샤워, 어디까지 참아봤니?

존 뮤어 트레일 - Day 16

by Noelles Adventure

2016년 6월 18일 Day 16.



출발: Deer Creek

도착: Reds Meadow

총 거리: 9.5 km

누적 거리: 276.16 km





이날은!!!

드디어!!!!

대망의!!!!

샤워를 할 수 있는 날이다.

두근두근 16일 만에 드디어 샤워를 할 수 있는 날이다.

꺄!!!!!!!!!!!!

(이렇게까지 느낌표를 찍었음에도 그 날의 흥분을 표현하지 못한다.)



나는 아침부터 진짜 눈이 번쩍 떠졌다. 얼른 일어나서 빨리 밥 먹고 빨리빨리 걸어서 제발 빨리 샤워하는 데까지 가고 싶어서 새벽같이 일어났다. 역시 사람은 하루 중에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어야 아침부터 동기부여가 잘되는가 싶다.



오늘 목적지는 레즈 메도우 (Reds Meadow)다. 여기는 캐빈이 있는데 좀 쉬어야겠어서 여기서 돈 내고 1 박하기로 했다. 아 수도꼭지를 틀면 따뜻한 물이 나오고 비바람을 막아줄 지붕과 벽이 있다니! 이 두 개가 나에게 너무나 절실했다. 여기는 내 마지막 resupply하는 곳이기도 하다. 원래는 두 번째 resupply했었던 MTR에서부터 5-6일 뒤에나 여기 도착하는 게 예정이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빨리 걸어서 resupply 하고 3일 만에 다시 또 resupply를 하게 됐다. 쩝...





99AD4D4C5BE5F7EF17467C 레즈 메도우 가는 길



크흡 안타깝게도 가는 길을 보니 산불이 났었나 보다. 레즈 메도우까지는 10 km 가량이 남았는데, 아마 지금껏 이토록 빨리 걸었던 적도 없었을 거다. 거의 경보하는 수준으로 걸었다. 걷는 내내 진심 넘나넘나 신났다. 가다가 반대방향에서 오는 사람들을 몇 명 만났는데, 대부분은 레즈 메도우에서 당일 산행을 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20분이면 간다고 그랬다. 분명히 20분 전에도 누가 20분이면 간다고 했는데 왜 안 나오는 거죠?






난 이 순간을 똑똑히 기억한다. 걷는데 저어기 앞에 차가 지나가는 거다. 왓? 차? 헐... 진짜 내가 문명에 가까이 오기는 했구나 느꼈다. 진심 한발 한발 내딛는데 왤케 감동적이었는지 모르겠다 (아직 끝난 것도 아닌데 호들갑). 좀 더 걷자 드디어 아스팔트 길이 나왔다. 근데 진짜 아스팔트 길이 너무 생소한 거다. 계속 울퉁불퉁한 흙, 돌, 눈길만 걷다가 너무나 인공적으로 평평하고 깔끔한 아스팔트 길을 보니까, "이 위를 내가 걸어도 되나. 걸으면 무릎에 무리 가는 건 아닌가" 막 별 쓸데없는 생각이 다 들더라. 진심 생경했다. 맨날 보던 아스팔트 길인데 16일 만에 봤다고 거리감이 느껴졌다.







99B1DF4C5BE5F7F61693C6 레즈 메도우 도착!




Reds Meadow 도착이다! 꺄! 배낭을 집어던지고 여기 있는 유일한 슈퍼에 갔다. 내가 진심 학수고대하던 콜라랑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서다. 슈퍼에서 일단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먹는데 진심 개감동. 너무 맛있었다. 매그넘은 언제 먹어도 맛있는데 산 타다가 먹는 매그넘은 진심 꿀맛이다.



주변에 피크닉 테이블이 있고 의자가 있고, 뭘 올려놓을 데가 있는 게 너무나 생소하게 느껴졌다. 고작 2주 남짓 문명이랑 떨어져 있던 건데도. 영화 캐스트 어웨이처럼 문명에서 한 3년 넘게 떨어져 있다가 다시 돌아오면 나도 톰 행크스처럼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해볼 것 같다.



Reds Meadow는 캐빈 몇 개, 작은 식당 하나, 슈퍼 하나, 버스정류장 이렇게 있었다.





2016-06-18 12.20.27.jpg 레즈 메도우 슈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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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기서 파는 거 별거 없는데도 계속 구경했다. 이날 캐빈에 다행히 방이 있어서 방을 잡았다. 내가 이날 너무 신난 나머지 일찍 도착해서 아직 방이 준비가 안됐다고 일단 여기서 밥 먹고 있으라고 했다. 데헷 그렇다. 여기는 식당이 있다. 오예! 근데 내가 또 너무 일찍 온 나머지 아직 식당이 점심식사 준비가 안됐다고 한다. 그래서 일단 마지막 resupply를 받고 짐 정리를 하기로 했다.



마지막 리써플라이 보급품을 찾았다. 나참나 물건을 올려놓을 수 있는 탁자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진심 행복했다. 뭐 하나하나가 다 행복했다. 두 번째 보급품 받은 지 3일밖에 안됐고, 애초에 내가 먹을 걸 너무 많이 보냈고, 그래서 역시 먹을게 넘나 많이 남았다. 이 피크닉 테이블 주변에 사람이 몇 명 있었는데, 여기 명물인 데블스 포스트파일 (Devil's Postpile)을 보러 왔거나, 당일 산행을 왔거나, 아니면 주변 호수에 낚시를 하러 온 사람들이다. 내가 짐 정리를 하고 있으니 주변 사람들이 도대체 뭐 하는 거냐고 물어봤다. 존 뮤어 트레일 (JMT)한다고 했더니 다들 대단하다고 치켜세워줬다. 헐 지금까지는 PCT 하이커들 사이에서 쭈구리였는데 이렇게 누가 칭찬해주니 또 기분은 좋더라. 그래 내가 하는 것도 대단한 거지 에헴.



데블스 포스트파일 Devil's Postpile은 주상절리 같은 것인데, 미국에 국립 역사 유적지로 지정돼 있다. 이게 되게 유명한 관광지라는데 몰랐다.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 관광지는 레즈 메도우에서 걸어서만 갈 수 있다. 그리고 Reds Meadow는 본인 차로 접근은 불가능하다. 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레즈 메도우에 와서 걸어서 주상절리를 봐야 한다.





99B2384C5BE5F80717BF85 마지막 리써플라이




여기서 마을로 가는 버스가 있다. 짐 정리하는데 내가 초반에 만났던 (나보고 옷 하얗고 하루에 많이 못 걷는다고 약간 비웃었던 무리들) PCT 하이커들이 여기서 마을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이컨이랑 엑시랑 블루 등등이 다 있었다. 휘트니 가기 전에 보고 그동안 거의 10일 넘게 한 번도 못 만났는데 여기서 다시 만나서 좀 신기했다. 알고 보니까 얘네들은 1주일 전에 키어싸지 패스 (Kearsarge Pass) 넘어서 마을에 내려갔다 왔다고 한다. 마을에서 1박 하고 그다음 날 다시 돌아오려고 했는데, 마침 그날이 제가 산에서 눈폭탄 맞은 날이었다. 날씨가 지나치게 안 좋으니까 그날 못 돌아오고 결국 마을에서 어쩔 수 없이 2박을 하고 산으로 돌아왔단다.



그동안 나는 천천히, 그치만 꾸준히 걸어왔고 갈수록 체력이 붙어서 그네들만큼 빠른 속도로 걸어와서 결국 여기서 만났다. 데헷. 베이컨은 날 보더니 진심?????? 하는 표정이었다. 분명히 쟤는 지이이이이이잉짜 느린 애였는데 뭐지? 왜 우리가 같은 선상에 있는 거지? 이런 표정이었다. 훗.



그네들은 버스를 타고 마을로 떠났다. 아참 그리고 여기서 코튼볼, 나이트캡, 스페이스 카우보이와 그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게 된다. 코튼볼이 이때 생일이어서 마을에서 특별히 2박을 한다고 했다. 자기는 영화가 너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나이트캡과 생일맞이 영화 보러 갈 거라고 했다. 혹시나 다시 만나지 않을까 했지만 끝까지 못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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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 식당이 열었다. 사진으로 보면 별로 맛없어 보이는데 진심 존맛탱 (JMT)였다. 일단 콜라 한잔 시켰고 햄버거 하나 후딱 해치우고 후식으로 케익이랑 커피도 한잔 했다. 이 모든 게 행복이고 이 모든 게 감동이었어요 크흑.



PCT 애들도 다 버스 타고 떠나고 주변은 꽤 조용해졌다. 그 사이 내가 묵을 캐빈이 준비됐다네요? 오마이갓 오마이갓 오마이갓!!! 느낌표가 모자란다.






99E1474A5BE5F80F1A0CF4 초호화 럭셔리 캐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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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세상에 나는 벽 있고 지붕만 있어도 감사한데, 무려 라지에이터가 있었다. 흐엉어엉 감동의 연속. 일단 짐을 대충 풀어놓고 샤워를 먼저 하기로 했다. 샤워하기 전에 이 몰골을 남겨놓고 싶어서 사진을 찍었다. 묶고 있던 머리 고무줄을 풀었는데 머리가 안 내려오고 고대로 있더라. 얼마나 떡이 졌으면...



샤워하는데 뜨거운 물이 나와ㅠ 어뜨켕. 매 순간순간을 만끽하며 샤워했다. 너무 행복해서 결국 그다음 날 아침 샤워 굳이 안 해도 되는데 한번 더했다. 사워가 끝나고 나서 사실 갈아입을 새 옷이 없었다. 그나마 덜 더러운 잘 때 입는 옷으로 갈아입고 이제는 빨래할 차례다. 우왕 여기는 세탁실도 있어서 손빨래를 안 해도 된다. 일단 냄새나고 땀에 쪄든 모든 옷들을 다 빨래통에 넣고 돌려돌려~~~



빨래 기다리는 동안 나는 엽서를 사서 친구들에게 엽서를 썼다. 여기서 돈을 내면 가까운 우체국까지 가져다줘서 대신 부쳐준다. 난 소장용으로도 엽서 3개를 샀는데 이걸 무사히 안 구겨지게 가지고 다닐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돈 내고 소장용 엽서 3장은 내 주소로 보냈다. 집에 오니 3장 다 잘 왔다. 직인도 찍혀서 온걸 보니 거기서 부치길 잘했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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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 세 장은 액자에 넣어서 집에 걸어뒀다. 액자 위에 있는 포스터는 존 뮤어가 한 말인데 "Th mountains are calling. I must go."라고 쓰여있다. 왼쪽에 걸린 사진은 내가 샬롯 레이크 정션에서 찍은 사진을 캔버스에 프린트한 거다. 우리 고양이가 예쁘니까 고양이도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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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방금 전에 점심 먹었는데 또 배가 고팠다. 먹을 거 너무 많은데도 맨날 먹던 트레일 믹스나 육포를 간식으로 먹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난 또 슈퍼에 갔다. 콜라랑 선칩을 사 왔다. 침대에 누워서 선칩을 먹으며 콜라를 마시는 이곳은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




99DFC34A5BE5F80B1A42CE 지붕과 벽이 있다.


햇살 따땃~하니 참 좋았다. Reds Meadow도 결국은 산 한가운데 있어서 전파는 안 터졌다. 여기에 아~~~주 약한 와이파이가 있기는 한데 속도도 너무 느리고 잘 안 터져서 그냥 가족들하고 친구들한테 잘 있다고 일찍 끝날 거 같다 뭐 이런 이메일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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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어야죠 이제! 저녁은 사진 찍는 것도 까먹고 후딱 먹어버렸다. 후식 먹을 때나 정신 차려서 사진 찍었다. 이거 먹고 나서 결국 또 아이스크림 하나 더 먹었다.







걷는 속도가 얼마나 빨라졌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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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걸었는데, 맨 오른쪽 수직 화살표 지점이 불과 3일 전인 MTR (두 번째 resupply를 받은 지점)이다. 중간 화살표는 14일째 날, 그리고 16일째 오늘이 마지막 화살표. 초반 12일 동안 걸은 거리가 1/2이라면, 이 3일 동안 걸은 거리가 1/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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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전에 끝날 때까지 며칠이 남았는지 다시 계산해봤다. 아마 4박 5일만 지나면 이제 끝날 것 같다. 거리는 마일로 표시돼 있는데 내가 실제로 걸은 것보다 한 10킬로 적게 잡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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