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쓴 언니들 살면서 이런 이야기 종종 듣잖아요. 사실 드라마만 봐도 시종일관 안경을 쓰고 지내는 여자 주인공은 거의 없어 보여요. 기억도 가물한 미국 드라마 ‘어글리 베티’처럼 못생긴 여자 주인공임을 티 낼 때 안경을 쓰지요.그러다 어느 순간 또 안경을 벗고 ‘짠’ 변신을 해서 시청자들을 놀라게 하죠. 안경 쓰고 있는 동안엔 우중충한 이미지였는데, 막상 안경 벗고 화장을 하고 나니 이뻐 보이더라는 이야기는 안경이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꾸미는데 관심이 없던 것 아닐까요?
처음 안경을 쓰고 방송을 마친 임현주 앵커는 이날 SNS에 “오늘 안경을 끼고 뉴스를 진행했습니다. 속눈썹을 붙이지 않으니 화장도 간단해지고 건조해서 매일 한통씩 쓰던 눈물약도 필요가 없더라고요. 안경을 쓰고 나니 ‘왜 안경을 썼어?’라는 질문을 참 많이 받은 아침이었습니다”라고 글을 올렸다고 해요. 진한 화장을 해야 하는 여성 앵커들 사이에서 안경을 착용하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관행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고, 안경을 쓰던 안 쓰던 제 기준엔 풀메로 외모적으로 별 큰 차이가 보이지 않는 것에 두 번 놀랄 뿐입니다.
저 또한 안경을 꺼내 쓰는 날은, 무엇인가에 집중해야 하는 날,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는 날입니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는 거의 안경을 쓰고 출근을 한 것 같아요. 20대 한 참 꾸밀 때 라식을 해야 할 타이밍을 놓치고 나서, 메이크업을 소홀이 하며 안경 덕을 자주 본 30대를 지나, 20대 라섹한 친구들이 노안이 온다며 다시 안경 쓴 이야기를 들으며 눈 수술을 의심하는 40대가 되어 버렸네요. 저는 그저 안경을 자주 꺼내 쓴 것뿐인데 이런 변화의 시기를 다 비켜가고 이제 안경은 제 신체의 일부가 되어버렸어요.
세상을 남자, 여자, 공대 여자로 구분한다는 말을 듣으며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며 세상 풍파를 겪어낸 공대 언니들에게 방송계 아나운서의 이야기를 운운하는 것은 무성의 드센 여자들에게 결투를 거는 것이나 마찬가지일지도 몰라요. 많은 사람들이 뭔가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안경을 쓰지만 몇몇의 우리 쪽 언니들은 그렇지 않지요. 도시를 자세히 보기 위해 안경을 쓴 제인 제이콥스(1916년~2006년)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해요. 대중은 그를 시민운동가로 기억하지만, 저는 그녀를 현대 도시학의 선구자로 존경하기 때문이에요.
제인 제이콥스
웨스트 빌리지를 구하기 위해 기자회견 중인 제인 제이콥스의 역사적인 사진이에요. 대대손손 기억할 그녀의 모습이지요. 저 날은 공식적인 기자회견이었을 텐데 제인 제이콥스가 매스컴을 의식 할리도 없었겠지만, 왠지 안경을 벗은 모습을 상상해도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 보이네요. 왜냐면 그녀가 도시를 바라본 방식이 종 종 그녀의 안경에 비유되기 때문이니까요.
제인의 안경 vs 르 코르뷔지에의 안경
제인 제이콥스는 시력 교정 안경을 끼고 도시를 자세히 보았어요. 대부분의 안경테는 고양이 눈을 닮은 캣츠아이 테였지요. 그녀가 적수로 여긴 르 코르뷔지에의 고전적인 테와는 뚜렷하게 대비되는 모양이라는 것이 흥미로운데요. 그 당시 20세기를 통해 지배적이었던 도시계획의 이념은 르 코르뷔지에의 '빛나는 도시'로 대표되는 사고방식이었지만, 제인 제이콥스는 르 코르뷔지에의 '빛나는 도시'가 지닌 인간적 빈곤함과 문화적 저속함을 정확하게 지적했지요. 블록 크기를 줄이고, 용도를 다양화하고, 오래된 건물과 새 건물을 섞으며 여러 유형을 혼합하자며 르 꼬르뷔지에 이론을 반박했어요. 극단적으로 설명하자면, 르 꼬르뷔제 이론은 이명박식 갈아엎기 뉴타운 개발방식 같은 것이고 제인 제이콥스의 도시를 보는 방식은 문재인 정부의 도심재생의 방식같은 견해라고 설명드리면 확 와 닿을 것 같네요. 이런 견해의 차이만큼 안경에서도 차이가 있는데요. 르 코르뷔지에의 안경은 동그랗고 완고하며 남성적 표상이라 할 만한 합리주의자의 안경이었다면 제인의 안경은 그의 안경보다 더 발랄하고 여성적이며 생동감이 느껴지는 안경이라는 느낌이 든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어요. 그녀의 시선은 시계태엽처럼 규칙적인 질서가 아닌 생동하는 자발성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개방적인 차이 속에서 도시를 이해한 셈이에요. 캣츠아이 안경을 쓰고 말이죠.
르꼬르뷔지에
그 시절에 고가 안경을 살펴보면 르 꼬르뷔지에와 필립 존슨, 이오 밍 페이가 쓴 안경처럼 그들을 닮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제품이 유행이었다고 해요. 그 당시 스타 건축가를 상징하는 가장 기본적인 품목은 작고 동그란 안경으로 그런 안경을 쓴 건축가의 스타일과 명성을 동경하는 남자들이 꽤 많았다고 하니까요. 사실 지금도 많지요. 반면에 스타 건축가와는 다른 길을 간 제인은모든 위대한 활동가가 그랬듯 그녀도 시간이 갈수록 악명을 떨쳤고, 방대한 범위에서 다양한 얼굴로 변신하며 이름을 알렸어요. 한편으로는 깊이 있고 독창적이며 우아한사상가의 면모를 보이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든 공론의 장에 올라 발언하고 속기사의 메모를 낚아채 관료제의 무자비함을 바로잡고 재개발로부터 동네를 지키려는 주민들의 의지를 모으기 위해 집집마다 방문하던 열혈 여성의 모습을 보였지요. 제인은 인맥이나 외모가 아닌 행적과 실천하는 사고방식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책상에 앉아 일하는 스타 건축가와는 다른 명성을 얻은 셈이죠. 그와 그녀의 안경이 다른 것처럼 말이죠.
저는 요즘 눈이 건조해서 렌즈 끼기가 힘들어지고, 안경을 쓴 모습이 나이가 들수록 고지식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셀프 편견에 사로잡혀 이제라도눈 수술을 해야 하는 것인가 고민이 많아요. 굳이 남의 시선 때문에 안경을 못 쓸 이유가 없는데 말이죠. 쓰고 안 쓰고의 문제가 아니라세상을 보는 프레임같은 나만의 안경을 찾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또 눈수술을 하면 다양한 안경테는 실컷 써 볼 수 있겠구나 싶기도하죠. 여튼, 친절해 보이고 싶어서 선택한 핵인싸 동글이 안경 그다음은 어떤 디자인이 어울릴지 고민을 해봐야겠어요. 이제 별로 친절해 보이고 싶지 않거든요.
이 글을 쓰면서 읽었던 책 목록
마이클 소킨 지음 조순익 옮김, <정의로운 도시 중 제인의 안경>, 북스힐즈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