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우면서도 희한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테니스를 치다 화가 났을 때의 일입니다. 코트 밖에서 다른 이야기로 계속 말을 걸어온 한 친구가 불을 지폈습니다. 상대는 전혀 웃기지 않은 이야기를 웃으면서 하더군요. 벤치의 반응은 경기 중 당연하지만, 경기와 상관없는 이야기로 이날따라 신경이 곤두서버렸습니다. 결국 ‘그만 이야기하라’고 정색하며 말했습니다.
다소 부끄러운 이야기는 여기까지고, 희한한 건 다음부터입니다. 무표정하게 말한 뒤에 처음 5분 정도는 불편했습니다. ‘화를 낼 만했나’ 생각이 머릿 속에서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경기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테니스가 잘 풀렸다면 (원래 잘했다면) 벌어지지 않을 사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찌됐든 일어날 일은 일어났습니다.
그럼에도 ‘화를 낼 만했다’는 결론을 내린 뒤로는 서서히 달라졌습니다. 상처를 받았다면 무심코라도 웃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믿습니다. 물론 무례함의 기준을 높게 잡아야 하고,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이 상처 입었다면 제가 나서서 화를 내는 게 맞습니다. 반격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업신여길 뿐, 제 이득은 전혀 없습니다.
한두해 전까지만 해도 분노는 ‘나쁜 감정’이라고 치부했습니다. 분노는 스스로에겐 위태롭고, 타인에겐 ‘미성숙’의 증거로 보일까 두려웠했던 것입니다. 화를 거의 내지 않은 성격이라고 스스로를 믿어왔지만, 실은 분노를 꺼내지 않았을 뿐입니다. 분노는 제게 사랑을 받지 못한 감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너는 들켜선 안 돼’라고 마치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뒀습니다.
분노의 재발견은 공교롭게 '내 삶의 주인공은 나'로 살자고 다짐하면서였습니다. 분노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 중 가장 거칠지만 가장 순수합니다. 그래서 분노를 다루지 못해 타인을 해칠까 겁먹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노를 잘 활용하지 못하면 삶의 주도권을 쥘 수 없습니다. 분노는 누구보다 나만 생각해서 움직이는 친구니까요. 예상치 못한 위기에 닥쳤을 때, 분노만큼 강한 의지를 북돋아주는 친구도 없습니다.
분노의 활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이유를 차분히 설명합니다. 그리고 화를 낸 건 미안했다고 사과합니다. 말하고 나면 조금 풀립니다. 분노에 몸을 지배당하지 않고, 손안에 쥐고 흔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지친 몸을 각성할 수 있습니다. 테니스뿐만이 아닙니다. 분노를 잘만 활용하면 운동에 유용합니다. 다른 어떤 감정보다 강한 힘을 주죠. 프로 선수에게 ‘각성’이란 단어가 붙을 때도 화가 난 뒤가 많은 경우도 이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정호승 시인의 시 ‘슬픔이 기쁨에게’에 나오는 말입니다. 가장 먼저 기쁨을 긍정하고, 힘들 땐 슬픔을 칭찬하고, 기분이 나쁠 땐 분노를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