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차 한 잔

당신의 이야기

by 뚜솔윤베씨

폴 킴의 노래에 코웃음이 나왔다. '완벽한 사랑'을 만난 것 같다는 노래 가사를 비웃기라도 하듯 뜨거운 녹차를 삼켰다. 추운 날이다. 완벽한 사랑 따위 없다는 냉소를 품고 카페에 앉아 있다.



남편과 솔이가 시댁에 갔다. 이번 주말은 혼자만의 주말이다. 임신해서 몸도 무겁고, 내려가는 기차값도 만만치 않으니 모두 좋으라고 나는 집에 남기로 했고, 남편과 솔이는 분주하게 한 주를 마무리하고 기차에 올랐다. 아쉬움인지 기쁨인지 모를 마음으로 두 사람을 배웅하고 맞은편 카페에 앉아 녹차를 한 잔 마시고 있다. 폴 킴 노래를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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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가정적이고 육아에 적극적이라 이런 경우 일말의 걱정도, 불안함도 없다. 고마울 뿐이다. 우리가 백 점짜리 부부는 못되더라도 백 점짜리 부모 흉내를 낼 수 있는 시기에 있다는 게 고마울 뿐이다. 솔이는 엄마랑 있을 때 보다 아빠랑 있을 때 훨씬 더 '진짜' 웃음을 많이 짓는다. 솔이 말대로 엄마는 화가 너무 많고 잠이 너무 많고 '안돼'소리를 너무 많이 하는 엄마인 데다 놀이 기술이 부족하다 보니 뭐든 가르치려 들어서 솔이는 내가 좋을 리가 없겠지.



나도 한 때는 (영아기 때는) 나의 섬세하고 또는 예민한 면으로 솔이의 욕구를 즉시 채워주어 대체 불가능한 주양육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었는데, 이제는 그 방법이 잘 먹히질 않는다. 솔이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자라고 더 큰 세상을 만날 준비를 하는데 나는 아직도 갓난아이를 돌보듯 솔이를 대한다. 임신했다는 핑계로 궁둥이를 붙이고 입만 놀리다 보니 솔이가 감흥이 줄어들 수밖에. 아 _ 옛날이여.



요 며칠 밤낮이 바뀌어 고생을 좀 했다. 내가 고생을 한 게 아니라 솔이가 고생을 좀 했다. 잠 많은 엄마가 밤에 잠을 못 자고 아침에 등원 준비를 시키니, 까칠하고 바쁘다고 쪼아대기만 하고 말이다. 특히나 날이 추워져 어린이집 산책 시간이 없어지는 바람에 에너지가 남아도는 솔이는, 매일 아침 어린이집 가기 싫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웬만해선 받아줬을 투정을 단 하루도 받아주지 않았다. 솔이 입장에서는 늘 안된다고만 하는 엄마가 좋을 리 없겠지. 그래서 나는 이번 주 내내 솔이를 구슬리기도 하고 혼내기도 하고 미안해하기도 하고 또 소리를 질렀다 말았다 뭐 그런 자괴감 가득한 이상한 시간들을 보냈다. 휴 _ 그런 시간들이 남편의 시댁행으로 끝이 났다. 다행이다.




그런데도 내 안에는 끊임없이 차가운 기운이 맴돈다. 사랑 노래가 다 그러할 텐데도 콧방귀가 나오고 카페 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죄다 꼬여 보인다. 내 안에 친절함이라고는, 따뜻함이라고는 사라져 버린 듯하다. 솔이도 남편도 없으니 마음 편히 이렇게 베베 꼬인 상태로 있을 수 있어 그것 하나만은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면서.



왜 이럴까? 왜 이렇게 꼬여있을까?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생각하라는 임신 중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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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둘째 아이 성별이 나왔다. 남자아이란다. 초음파를 보는데 고추가 보인다. 꼬마 아이들이 스케치북에 그린 듯한 모양의 고추가 있다. 의사는 그 부분에 자꾸 동그라미 치면서 파란색을 준비하라고 말했다. 나는 놀라움인지 기쁨인지 모를 마음으로 '네'라고 대답만 하고 집으로 왔다. 다행이다. 아들이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일을 내가 해냈다. 친정 엄마도, 시부모님들도, 시조부모님들도, 남편도, 동네 엄마들도 내 배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아들을 바랐다. 심지어 나도 그랬다. 외동아들에 손이 귀한 집에 드디어 대를 이을 아들을 가졌다. 나는 훌륭한 일을 해냈다. 이제 어깨 펴고 고개 들고 다닐 수 있다. 큰소리도 칠 수 있겠다. 떳떳하다. 우리 엄마도 이제 사돈 볼 낯도 생기고 솔이 보고 가끔씩 '가시나' 소리를 하시는 시어머니한테도 기를 펼 수 있겠다. 셋째 안 낳아도 되겠다. 이제 끝이다. 야호.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무슨 그런 성차별적이고 속물 같은 소리를 하냐고 하겠지만, 나만 이렇게 고리타분한 생각을 한다고 몰아붙이겠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그들이 원하는 일을 해냈다는 것을, 그들의 기쁨을 품고 있다는 것을. 거짓말쟁이들. 이 문장을 적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온다. 카페에서 혼자 초콜릿 케이크에 녹차 마시는 임산부가 우는 모습이 지금의 내 모습이다.




그래, 이래서 내내 꼬여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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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내가 꿈꾸던 그런 멋있는 사람이 한 번도 되어 본 적 없다. 아들을 바라는 시댁에 요즘 같은 시대에 무슨 아들 타령이냐고 똑 부러지게 말해본 적도 없다. 6년 만에 가진 아이가 아들이 아니었음 이렇게 큰소리치며 살았겠냐는 시어머니 말에, 누구 집 며느리는 시집와서 딸만 내리 셋만 낳았다며 혀를 차는 시조부모님들의 말에, 둘째 임신 소식을 듣고서야 이제 사돈이 놀러 오라면 기분 좋게 갈 수 있겠다는 친정엄마의 말에, 나는 어떠한 코멘트도 달지 못했다. 그저 속으로 그들을 욕하면서도 어느새 내 안에서도 그들과 똑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지, 그들을 위한 건지 그런 것 따윈 생각조차 하지 않고 무슨 반항심인지 겉으론 딸이면 좋겠다고 괜한 허풍을 떨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절에 가서는 득남하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여자 아이 태몽을 꾼 뒤엔 혼자 속상해하기도 했다.



아마, 그런 나 자신이 얄밉고 싫어져서 나는 이렇게 베베 꼬여있나 보다. 나 스스로가 싫어져서.


막상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부모님들에게 알릴 생각을 하며 잠시 기쁨을 맛 본 뒤로는 내내 마음이 쳐진다. 여자 형제가 없었던 내 생애를 뒤돌아보면 솔이에게 여동생이 있음 참 좋을 텐데, 그런 아쉬움이 든다. 진짜 내 마음이 떠오른다. 자매가 같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진짜 내 마음일 텐데 내 마음까지 속이며 이제껏 무얼 한 건가 싶은 생각에 자꾸 냉소가 지어진다. 누구 좋으라고, ' 잘했다 오구오구 ' 그놈의 쓸데없는 '남 좋은 일'하려고 여태 그렇게 마음을 졸였나 싶어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난다. 성별은 내가 정하는 것도 아닌데, 그 덕을 보려고 잠시나마 마음먹었던 나 자신이 부끄럽다.




이런 마음조차 누구 좋으라는 건지는 모르겠다. 태교에도 안 좋고 둘째는 또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고, 솔이에겐 무슨 말을 하려고...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이런 말을 사람들에게 한들 누가 알아준다고, 다들 나만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할 텐데. 나는 왜 이렇게 깔끔하지 못한 지 나는 왜 이리 질척거리는 인생을 사는 건지.





......


녹차나 한 잔 더 마시고 일어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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