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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메뉴: 대화

<꿈을 이야기한 동료의 빈자리> #4

by 케니스트리

연무가 걷혀야 윤슬이 보이듯, 어수선한 마음을 덜어낸 눈에 작년 여름부터의 추억이 서린 공간이 보였다. 그리운 이가 앉았던 자리며, 입구 쪽 작은 선반 위에 놓인 소소하지만 섬세한 배려가 담긴 물건들, 자연광과 어우러져 더 편안해 보이던 조명, 품 가득 바깥공기를 마주하는 개방감 있는 통창이 눈에 들어왔다. 영원할 것만 같았는데, 끝에 다다라서야 미처 몰랐던 소중함이 아쉬운 건 공간이나 사람이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얼마 전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에 걸쳐 다녀온 내가 좋아하는 카페 이야기다. 일요일은 그 카페가 그 자리에서 영업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보통은 주말 양일을 모두 가지는 않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드니 한 번이라도 더 들러보고 싶었다.


그 카페의 장점은 크지 않고, 시끄럽지도 번잡하지도 않은 데다가, 곳곳에 놓인 꽃과 조명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분위기다. 감성의 나머지를 채우는 아로마 가득한 커피, 사장님이 손수 구워 내오던 휘낭시에와 치즈케이크도 빠질 수 없다. 그리고 덤이자 사실상 가장 큰 매력은, 그 카페가 아직도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즘 흔한 키오스크 없이 직접 주문을 받고, 쿠폰도 종이에 스탬프를 찍는 방식이었다. 몇 마디라도 오가는 인사와 대화가 좋았던, 나만의 작은 카페가 잠시 문을 닫는다니, 경계가 불분명한 정에 발길을 떼기가 참 어려웠다.


한동안 자주 찾다가도 자연스레 발걸음을 끊게 된, 회사 앞 카페와는 대조적인 장면이다.


“저 앞에 키오스크에서 주문하세요”


익숙하게 인사를 건네며 늘 마시던 라떼를 주문하자, 돌아온 사장님의 반응은 의외의 U턴 같은 안내였다. 카운터에서 주문이 안 되는 것도 아닌데, 굳이 키오스크로 가라고 하니 반가웠던 인사는 반 토막이 났다.


생각해보면 참 정성이 느껴지는 카페였다. 늘 웃으며 반겨주던 사장님의 커피 맛이 좋아서, 근처에 더 저렴한 카페가 있어도 종종 그곳을 찾곤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 늘 그렇듯 매대 앞에서 사장님께 주문을 했다. 그런데 익숙한 풍경 속에 느닷없이 들어선 키오스크는 어색했다. 공간 분위기가 딱히 취향은 아니었지만, 주문할 때마다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건네던 사장님이 커피 맛 못지않게 편안하게 느껴졌던 곳이었다. 키오스크의 편리함도 좋지만, 한가한 시간엔 예전처럼 직접 주문을 받아줬다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이 남는다.


스타벅스에는 키오스크가 없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커피를 파는 카페 중 하나인 스타벅스엔 아직도 키오스크가 없다. 물론 ‘사이렌 오더’라는 온라인 주문 시스템은 있지만, 매장 안에는 진동벨도 없고, 직원이 직접 이름이나 닉네임을 불러준다.


“oo님, 주문하신 라떼 나왔습니다!”


웬만한 카페나 식당이 편리함을 이유로 키오스크를 도입한 것과 달리, 스타벅스는 여전히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게 고집인지, 배려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스타벅스는 시대에 뒤처진 게 아니라 무언가를 ‘지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거다.


요즘엔 어디를 가든 우리가 처음 마주하는 소통의 대상이 하얀 프레임의 기계라는 점이, 편리하면서도 동시에 조금은 차갑게 다가온다. 실수 없는 로봇 리더처럼 느껴진달까. 하지만 기계가 추구하는 건, 가끔 자리를 비우기도 하고, 때로는 급히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며, 일 외에도 나눌 이야기가 많은 동료와는 확실히 다르다.


그런 인간미 대신 합리와 효율로 무장한 키오스크 같은 시스템은, 가게 입장에서는 잘만 관리되면 무척 편리할 수 있겠지만, 챗봇이나 ARS 고객센터처럼 어딘가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인상도 함께 준다. 라떼의 우유 양을 조절하거나 시럽을 추가할 수는 있지만, ‘덜 뜨겁게’ 같은 섬세한 요구는 할 수 없다. 결국 그런 부분은 사람만이 채워줄 수 있는 영역이다.


사람과 기계, 상호 보완


마케터로 일하면서 종종 업계 동료들로부터 ‘AI가 우리 직업의 위기’라는 얘길 듣곤 하는데,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기계가 잘하는 일은 기계가 하고, 사람은 그 덕분에 생긴 여유로 좀 더 사람다운 일을 하면 되지.” 물론 들으면 속 편한 말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창작의 영역에선 실제로 사람이 전체를 관리하고 기계가 초안이나 실행, 추출을 맡으면 품질이나 효율 면에서 효과적이었던 경험이 있다.


조직문화 업무를 할 때도 예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기획에 쓸 수 있게 된 건 다양한 디지털 협업 툴 덕분이었다. 피그마, 노션으로 협업하고, 슬랙으로 소통하면서 회사가 추구하는 문화적 가치는 더 빠르게 전파됐다. 그래도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하는 일은 여전히 직원들과 직접 만나서 나누는 1:1 미팅이나 팀 면담, 아이디어 회의 같은 자리다. 그리고 꼭 알렸으면 하는 공지나 중요한 이벤트는 종이에 인쇄해서 공간 곳곳에 붙여두기도 한다. 모두 A.I를 통해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역할


로봇이 커피를 제조하고 서빙까지 맡는 카페 이야기를 들었다. 얼핏 들으면 무인 카페처럼 들리지만, 그곳엔 사람 직원도 근무한다. 다만 역할이 조금 다르다. 이 카페에선 로봇이 커피를 만들고, 사람 점원은 바에서 손님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조용히 혼자 있고 싶은 손님에게는 그 시간을 존중하며 방해하지 않는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사람다운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AI가 지혜로운 마케터의 좋은 도구가 되는 것처럼, 우리가 머무는 공간도 좋은 시스템 덕분에 확보된 시간 안에서 사람다운 소통이 더 많이 오가는 문화가 됐으면 좋겠다.




그날 문을 닫은 그 카페가, 디지털 가속화 시대에 몇 남지 않은 아날로그 휴식처로 다시 돌아오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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