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이야기한 동료의 빈자리> #5
오늘도 일상을 평온하고 일관된 정성으로 채우는, 나의 동료들에게.
옛 동료에게 연락이 왔다. 오래전 한 회사에서 함께 일할 때, 역할은 달랐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만나 아이디어를 나누곤 했다. 인턴사원이던 그는 의욕이 넘쳤고, 아이디어도 늘 샘솟는 사람이었다. 그 시절, 그는 기꺼이 나의 문화 기획에 함께해 줬다. 대가는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그 일이 재미있고 보람차서.” 우리는 그 회사를 나선 후로 자주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았다. 그저 직간접적으로 서로의 근황 정도만 알고 지낸 시간이 수년째였다. 그러던 그가 결혼 소식을 전해왔고, 곧 만나 축하를 나누기로 했다. 때는 아침저녁엔 아직 외투를 벗기엔 쌀쌀했지만, 한낮은 제법 따뜻하던 4월의 봄이었다.
약속한 날, 약속 장소로 향하면서 곧 새신부가 될 옛 동료, 그리고 함께 만날 오랜 인연들을 떠올리며 마음이 설렜다. 하늘도 맑은 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카페를 닮은 식당이었다. 우리는 안부를 주고받고, 덕담을 나누고, 서로의 근황을 들었다.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즈음, 이 자리를 만든 예비 신부가 조심스럽게 가방에서 청첩장을 꺼냈다. 그리고 이름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건넸다. 종이 청첩장은 참 오랜만에 받아보는 것이었다. 요즘은 모바일로 보고 일정에 저장까지 가능한 스마트한 청첩장이 대세지만, 봉투에 이름까지 곱게 적힌 종이 청첩장은 왠지 특별한 초대를 받은 듯한 기분을 안겨줬다.
그런데 청첩장 봉투를 열기 전에, 그 뒷면에 눈이 한참 머물렀다. 뒷면에는 받는 이의 이름과 함께, 한 면 가득 우리의 추억과 초대의 의미가 편지 형식으로 적혀 있었다. 어떤 특이한 디자인보다도 더 눈길을 끄는, 값진 한 장의 편지였다. 오늘의 주인공은, 초대받는 이들조차 그 축제의 장에 함께하는 또 다른 주인공으로 초대한 셈이었다. 그 편지를 보며, 언젠가 편지에 대해 읽었던 한 문장이 떠올랐다.
편지는 나에게만 읽는 것이 허락된 세상에서 가장 호사스러운 소설이다.
돌아오는 길엔, 어린 시절 생일을 앞두고 만들던 ‘초대장’이 떠올랐다. 색종이에 색연필로 ‘초대합니다’라고 정성껏 쓰고, 친구 이름과 날짜, 장소를 적던 기억이 참 즐거웠다. 그 초대장은 주는 이와 받는 이를 모두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전달받으면 그 자체로 감사한 일이고, 요즘처럼 단체 채팅방에 ‘일일이 찾아뵙고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공유되는 모바일 청첩장이 흔해진 세상에선, 손글씨로 정성 들여 만든 초대장이 그저 클래식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하긴, 예전엔 온라인 플랫폼이 없었기에 물리적으로 가까운 이들과의 연결고리가 더 단단했고, 그래서 가능했던 정성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진심으로 축하하고 싶은 사람만 초대했다면, 지금은 관계의 의미가 옅고 넓게 확장된 탓에 디지털 초대장이 효율과 편리 면에서 더 적합해진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받는 입장에선, 오랫동안 연락이 없다가 결혼식 직전에 “경황이 없어 이렇게라도 먼저 인사드립니다”라는 모바일 청첩장을 받는 건, 축하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솔직히 썩 유쾌하지 않을 때도 있다.
조직문화도 마찬가지다. 경험해 보니, 시간과 정성 없이 잘 자리 잡는 문화는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대충 돈만 쓰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것도 깨달았다. 급히 꾸며낸 시끌벅적한 행사보다, 회사의 담백한 분위기 속에서 구성원들 사이에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성숙해 가는 관념이나 습관 같은 것들이 좋은 문화의 토대가 된다고 믿게 됐다. 디지털 소통이 지나치게 편해진 세상에선, 오히려 익명성 뒤에 숨은 악플이나 일방적인 비평이 넘치는 부작용도 자주 보이곤 했다. 그래서 오래 경험을 쌓은 문화 담당자라면, 크든 작든 활동에 정성을 들이게 된다.
초대하는 이가 안부와 추억, 그리고 정중한 메시지를 편지 형식으로 꼼꼼히 담아 건넨 그 청첩장은, 한동안 가까이에 두고 여러 번 다시 읽었다. 아마 나처럼, 그 청첩장을 받은 많은 이들이 이 젊은 예비부부의 정성에 감동했고, 진심으로 축하했을 것이다. 예비부부는 ‘계획부터가 여행’이라는 걸 아는 멋진 여행자 같았다. 초대할 사람을 함께 정하고, 청첩장을 준비하며, 봉투에 손 편지를 쓰는 모든 과정을 정성껏 함께한 그 시간은, 의미를 담아낸 여정의 출발이었으니까.
아직도 조직문화를 떠올리면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던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갔던 이야기들이다. 손으로 마음을 적은 청첩장 같은 편지를 다시 떠올리며, 결과나 성과와는 별개로, 그 과정 자체가 좋았던 기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