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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던 동료가 점심을 먹자고 했다

by 케니스트리

회사의 실적 공유를 준비하면서 최신 정보를 수집하던 중, 전체 직원 수와 연내 채용 계획을 유관부서 담당자에게 물어봤다. 그러자, 실질적으로는 퇴사했지만 계약상 고용이 유지 중인 직원도 숫자에 포함시킬지를 되물었다. 현재 시점 기준의 수치가 필요했기 때문에 모두 포함한 수를 요청했고, 필요한 정보를 얻었다. 그 과정에서 곧 고용 데이터베이스에서 사라질 한 직원을 알게 됐다. 바로 몇 달 전, 평소 교류가 없던 나에게 용기를 내어 점심을 함께하자고 했던, 그리고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았던 그 직원이었다.


그 동료는 조직에 적응하는 걸 어려워했다. 왜였을까. 물론 조직 내부에도 불협화음이나 단절의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당사자에게도 원인이 없지는 않았을 거다. 보통 새로운 사람이 조직에 들어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선, 그 당사자의 노력이 더 필요할 때가 많다. 조직은 여럿의 집합체이고, 고착된 문화가 있으며, 개인의 영향력이 구성원 전체에 비하면 작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조직의 시각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개인의 입장에서 조직은 하나의 커다란 세력처럼 느껴진다. 새로 들어온 구성원은 그 안에서 너무도 작고 미미한 존재다. 경험상, 이런 감정은 직급이나 나이와도 무관하다. 오히려 경력이 많은 신입이 위로부터의 기대와 동료의 견제, 아래로부터의 텃세까지 겹쳐 더 큰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됐다. 그래서일까. 조직의 여럿이, 동료들이 마음을 조금만 더 모은다면, 새로 온 한 사람을 보듬는 일이 그 개인이 적응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보다 훨씬 쉬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글은, 결국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서를 전전하다가 연수를 채운 뒤 퇴사한 직원을 비판하려는 글도,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조직이나 리더에게 묻는 글도 아니다. 다만, 사람의 관계든 조직의 조화든, 한 번 틀어진 건 어느 순간 반드시 바로잡을 시기가 있고, 그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지나간다는 걸, 경험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다.


“어차피 떠날 사람은 떠나가!”


혹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차피 떠날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보내는 데 익숙한 조직이 있을 뿐이다.”




“혹시 오늘 점심 약속 있으세요?”


어느 날, 한 동료가 물어왔다. 하는 일도 다르고, 같이 할 일도 없고, 나이도 키도 전혀 다른 그 동료와의 접점이라곤 ‘같은 회사에 다닌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런 동료들이 꽤 많다. 오가며 인사는 나눠도 말을 섞을 일이 없어 며칠이고 지나가도 별 인연 없는 사이. 그러니 그 동료가 점심을 함께 하자고 한 건 의외였다. 보통은 팀원들과 함께 식사하던 나였지만,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점심시간. 함께 식당으로 가는 길, 메뉴를 고르는 시간, 식사를 시작하는 순간까지도 그냥 일상적인 대화만 오갔다. 나이가 조금 더 많은 나는 어색하지 않도록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그러다 문득 물었다.


“요즘 회사생활은 좀 어때요?”


그 물음에 동료는 잠시 말을 멈췄다. 짧은 정적. 그사이, 그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스친 게 느껴졌다.


리더와의 갈등


작은 한숨과 함께, 이야기는 ‘리더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입사 첫 달에는 잘 챙겨주고 자주 칭찬해주던 리더가, 두 달째부터는 변했다고 했다. 업무 지시를 받고 잘 이해가 안 돼 되물으면, 설명 대신 “이제 알 때도 되지 않았냐”고 질책을 하고, 회의 시간에는 공개적으로 비판을 하면서 자존심이 상한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감이 사라졌고, 팀 내에서도 점점 고립감을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결국 동료들과 자연스럽게 단절되었다는 말이 한숨과 함께 나왔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떠오른 건, 평소 그의 이미지였다. 말수가 적고 혼자 점심을 먹는 일이 많아 보였고,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 오가며 마주칠 일도 거의 없었다. 원래는 밝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이라는 그는, 큰 기대를 품고 들어온 회사에서 점점 풀이 죽어 있는 듯했다. 최근엔 대인기피와 우울감도 생겼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저 들어주고 상투적인 위로나 일반적인 조언을 건네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 리더도 아니고, 어떤 조치를 취할 권한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래전 내가 겪었던 팀장과의 불화가 떠올랐다.


조력자


한 회사에 경력 초기로 입사했을 때였다. 한창 밝은 얼굴로 다니던 나를 맞은 팀은 팀장 포함 네 명이었는데, 그 팀장은 날 자주 혼냈다. 그땐 종이에 출력해 수기 결재를 받던 시절이라, 보고서를 들고 팀장에게 가는 일이 참 두려웠다. 회의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보고 회의에서 질책이 이어졌고, 때로는 스스로 답을 찾을 때까지 침묵으로 몰아세우기도 했다.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직접 대화를 시도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인사팀장님을 찾아가, 익명을 조건으로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 회사에는 인사팀원이 여럿 있었고, 인사팀장님은 구성원들과 자주 면담을 하던 분이었다. 경력이나 직급과 상관없이 누구든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 면담을 통해 위로도 받고, 통찰도 얻었으며, ‘노력해도 안 되면 다른 방법도 있으니 걱정 말라’는 든든한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번 동료와의 대화는 그때와 달랐다. 결정적인 차이는 ‘시스템’의 유무였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건넬 수 있는 말 외에 실질적인 조력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고 했다.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리더 같아서 찾아왔다는 말에 감사하면서도, 딱히 해결책을 주지 못하는 내 상황이 미안했다.


여러 회사를 거치며 많은 인사팀을 봐왔다. 그중 한 회사에선 직접 인사팀 소속으로 일해본 적도 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건, 어떤 문제든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인사팀이 있는 회사는 많지 않다는 거였다. 그래서 요즘의 소통은 ‘허심탄회’보단 ‘눈치껏 적당히’, ‘어프로치’보단 ‘거리두기’가 더 익숙해진 게 아닐까. 사람 일이라는 뜻의 ‘인사(人事)’라는 단어가 새삼 의미 있게 느껴졌다. 점점 더 전문화되고 분화되는 인사 시스템 안에서, 인간적인 균형이란 어떤 모습일까. 마치 챗봇이나 ARS의 딱딱한 문의 시스템처럼, 모호한 고민에 명확한 매뉴얼은 가끔 낯설게 느껴진다.


현재 회사는 규모가 작아 인사팀이 따로 없다. 채용은 경영진 승인 하에 각 팀 리더가 진행하고, 제반 업무는 총무부에서 맡고 있다. 부대표가 인사 리더 역할을 겸하고 있어, 종종 직원들이 면담을 신청한다. 하지만 ‘면담’이라는 형식과 상대의 직급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이번에 용기 내어 평소 교류 없던 나에게 점심을 청한 직원처럼 말이다.


소통 창구


이 일을 계기로, 회사에 하나쯤은 소통 창구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컬처 앰버서더’라는 구성원 참여형 제도를 제안했고, 현재 1기가 운영 중이다. 역할은 전사 이벤트를 기획·운영하고, 환경 개선에 참여하며, 직원들의 고충을 듣고 필요시 조직에 건의하는 일 등이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시행착오를 거치며 개선 중이고, 이를 위한 소통 역시 계속되고 있다. 또, 나 역시 팀원들과만 식사하지 않고 다른 부서 직원들과도 어울리려 노력한다. 나이로나 직급로나 조직의 허리쯤 되는 이 위치가, 그런 다리 역할을 하기에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 직원은 부서 전배를 시작으로, 결국 조직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전배가 조직과 개인 양측에 나름의 해결책이었겠지만, 결국은 헤어짐을 선택하게 된 셈이다. 마지막 날, 인사를 하러 온 그에게 “고생 많았어요”라는 말밖엔 해줄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더 일찍 알았더라면,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라는 미안함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기를, 그리고 앞으로의 길이 뚜벅뚜벅 이어지되, 가끔은 좌우 앞뒤를 살피는 여유로운 일상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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