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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니스트리 Oct 22. 2024

정성의 초대장

오늘도 일상을 평온하고 일관된 정성으로 채우는, 나의 동료들에게.




옛 동료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오래전 한 회사에서 일할 때, 하는 일이 달랐던 그와는 최소 일주일에 한두 번은 모여 아이디어를 나눴습니다. 매우 의욕이 넘치고 아이디어도 샘솟는 인턴사원이던 그는 기꺼이 저의 문화 기획에 동참했습니다. 대가는 없었고, 이유는 단 하나 '그 일이 재미있고 보람차서'였습니다. 우리는 그 회사를 떠나며 자주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직간접 적으로 서로의 근황 정도는 알고 지낸 것이 수년째입니다. 그 동료가 결혼 소식을 전했고, 곧 만나서 축하와 초대의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때는 아침저녁으론 아직 외투를 벗기엔 다소 쌀쌀하지만 낮엔 제법 따스한 4월의 봄이었습니다.


약속한 날 약속 장소로 향하며, 새신부가 될 옛 동료, 함께 만날 오랜 인연들을 마주할 생각에 설레었습니다. 하늘도 맑은 길을 걸어 도착한 카페를 닮은 식당. 우리는 서로 안부를 묻고, 덕담을 건네고, 근황을 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식사가 마무리될 즈음, 이 자리를 만든 예비 신부가 조심스럽게 가방에서 청첩장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이름을 확인하고 건네주었습니다. 종이 청첩장,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습니다. 요즘엔 모바일폰으로 보고 바로 일정에 저장도 할 수 있는 스마트한 청첩장이 대세인데, 봉투에 이름까지 곱게 적은 청첩장은 왠지 특별한 초대를 받은 기분이 들게 했습니다.


그런데, 청첩장 봉투를 열기 전에 그 뒷면에 눈이 한참 머물게 되었습니다. 뒷면에는, 받는 이의 이름과 함께 한 면 가득 우리의 추억과 함께 초대의 의미가 편지 형식으로 쓰여 있었습니다. 그 어느 특이하고 새로운 디자인의 눈길을 끄는 것들보다 더 값어치 있는 빼곡한 편지글. 오늘의 주인공은 초대받는 이들조차 그 축제의 장에 주인공으로 초대했습니다. 언젠가 편지에 대해 쓴, 매우 공감되었던 짧은 글이 생각났습니다.


편지는 나에게만 읽는 것이 허락된 세상에서 가장 호사스러운 소설이다

만남을 마무리하고 돌아오면서, 어린 시절 생일이 가까워 올 때 만들던 '초대장'이 생각이 났습니다. 색종이에 색연필로 정성스럽게 '초대합니다' 제목과 친구의 이름, 날짜와 장소 등을 적는 일이 무척 즐거웠습니다. 이 초대장은 주는 이와 받는 이 모두를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 신묘한 힘을 지녔습니다. 개인적으로 받게 된다면 그나마 감사한 일이고, 단체 채팅방에 '일일이 찾아뵙고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한마디와 함께 공유되는 모바일 청첩장이 일상인 요즘엔 정성껏 손글씨로 만든 초대장은 클래식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하긴, 예전에는 온라인 플랫폼이 없었던 만큼 물리적으로 가까운 이들과의 연결고리가 더 견고해서 가능한 정성이었을지 모릅니다. 또, 그때는 진심으로 축하해 줄 사람들만을 초대했다면 지금은 그 대상, 즉 관계의 의미가 옅고 넓게 확장된 것일지도. 그런 문화 속에서 디지털 초대장이 효율과 편리 측면에서 가장 적합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서로 연락이 없다가 결혼식이 임박해서 '경황이 없어 이렇게라도 먼저 인사 드림을 양해 부탁 드린다'며 보내오는 모바일 청첩장은 축하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사실 썩 달갑지 않은 기분일 때가 많았습니다.


조직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경험해 본 결과 시간과 정성 없이 잘 자리 잡는 문화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충 돈만 들여하려면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급하게 꾸미듯 만드는 시끌벅적한 행사보다, 담백한 회사의 분위기에 구성원들 사이에서 자생되고 성숙해 가는 관념이나 습관 같은 것들이 좋은 문화의 토대가 된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디지털 소통이 너무 편한 세상에서 그것에 지나치게 의지하다 보면, 익명성 뒤에 숨은 악플이나 비평이 성하게 되는 일방향의 부작용이 생기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니 오랜 경험의 문화 전문가는, 크든 작든 활동에는 정성을 들입니다.




초대하는 이가 꼼꼼히 안부와 추억과 정중한 초대의 메시지를 편지 형식으로 빼곡히 적어 건넨 청첩장은 한동안 가까이 두며 여러 번 읽어 보았습니다. 아마 저와 같이, 그 청첩장으로 초대받은 많은 분들이 이 젊은 예비부부의 정성에 감동하고 진심으로 축하했을 것입니다. 예비부부는, 마치 '계획부터가 여행'이라는 즐거움을 아는 멋진 여행자 같기도 했습니다. 초대할 사람 목록을 정리하고, 청첩장을 마련하고, 봉투에 손 편지를 적는 모든 과정을 함께 하며 정성으로 빚은 그릇에 의미를 양식으로 담아 삶의 여정을 손 꼭 잡고 시작한 셈이니까요.


아직까지도, 조직문화를 떠올리면 기억에 남는 것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한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간 이야기입니다. 손으로 마음을 적은 청첩장 모양의 편지를 보며, 그 동료와의 추억과 함께 결과와 관계없이 좋았던 정성의 과정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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