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니스트리 Oct 15. 2024

마지막 메뉴: 대화

키오스크가 돌려세운 발걸음

오늘도 일상을 평온하고 일관된 정성으로 채우는, 나의 동료들에게.




연무가 걷혀야 윤슬(해나 달이 비친 반짝이는 잔물결)을 보듯, 어수선한 마음 덜어낸 눈에 작년 여름부터의 추억이 서린 공간이 보였습니다. 그리운 이가 앉았던 자리며, 입구 쪽 작은 선반의 소소하지만 섬세한 배려가 돋보이는 용품들, 자연광이 어우러지면 더 편안한 조명과 품 가득 바깥공기를 만나는 개방감 있는 통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는데, 끄트머리에 가서야 채 몰랐던 소중함이 아쉬운 건 공간이나 사람이나 매한가지인 듯합니다.


얼마 전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에 걸쳐 다녀온 좋아하는 카페 이야기입니다. 일요일은 카페가 그곳에서 영업하는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보통은 그렇게 토요일과 일요일을 다 챙겨가지 않는데, 마지막이란 생각이 드니 한 번이라도 더 들러보고 싶었습니다.


이 카페의 장점은 크지 않고, 시끄럽거나 번잡하지 않고, 곳곳에 꽃이며 조명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분위기입니다. 또 감성의 나머지를 채우는 아로마 가득한 커피와, 사장님이 손수 구워 만들어 주던 휘낭시에며 치즈케이크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덤이자, 사실 가장 큰 이 카페의 매력은 여전한 아날로그에 있습니다. 요즘 그 흔해진 키오스크가 없고, 쿠폰도 스탬프를 찍는 방식입니다. 최소한 몇 마디라도 주인과 객이 인사며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어 좋았던 나만의 작은 카페가 잠시 문을 닫는다니, 경계가 불분명한 정에 발걸음을 떼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한동안 즐겨 찾다가 자연스레 발걸음을 하지 않게 된 회사 앞 카페와는 상반된 장면입니다.




"저 앞에 키오스크에서 주문하세요"


반가이 인사를 건네며 늘 마시던 라떼를 주문하자 돌아온 사장님의 반응은, 의외의 U-턴 신호와 같은 안내였습니다. 카운터에서 주문이 안 되는 것도 아닌데, 키오스크로 가서 주문하라는 사장님의 요구에 반가운 인사는 반토막이 났습니다.


돌이켜보면 참 정성인 카페였습니다. 늘 웃으며 반겨주던 사장님의 커피맛이 좋아 근처에 더 저렴한 카페가 있었음에도 종종 찾았습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당연하게 카페 앞에서, 늘 그렇든 문을 열고 들어가, 언제나와 같이 매대 앞에서 사장님께 직접 주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익숙한 카페에 키오스크 시스템은 어색했습니다. 분위기가 딱히 취향은 아니었지만, 주문할 때 한 두 마디 덕담을 건네주시던 사장님도 커피맛 못지않게 편안하다고 느껴 즐겨 찾던 공간이었습니다. 키오스크의 편리함을 누리되, 가끔 한가한 시간에는 직접 주문을 받기도 하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스타벅스에는 키오스크가 없다


세계에서 커피를 가장 많이 파는 카페 중 하나인 스타벅스에는 여전히 키오스크가 없습니다. (물론 ‘사이렌 오더’라는 온라인 주문 시스템이 있기는 합니다만,) 진동벨도 없고, 사람에게 이런저런 선택지를 넣어 주문을 하고 잠시 기다리다 보면 미리 정한 '이름(닉네임)'을 불러줍니다.


"oo님 주문하신 라떼 나왔습니다!"


웬만한 식당 카페가 편하자고 도입한 키오스크 시스템을 스타벅스는 아직 도입하지 않은 것이, 그들의 고집인지 아니면 배려인지, 어느 쪽에 더 이유의 무게가 실려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스타벅스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지키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요즘엔 어디를 가든 우리가 처음 마주하는 소통의 대상이 하얀 프레임의 기계라는 것은 편리한 만큼 조금 차갑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치 실수할 일 없는 로봇 리더 같달까요. 기계가 추구하는 것들은, 가끔은 자리를 비우기도 하고, 어쩌다가 급한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며, 일 얘기 말고도 나눌 즐거운 에피소드가 많은 그런 동료와는 확실히 다릅니다.


그런 인간미 대신 합리와 효율로 무장한 키오스크, 즉 주문 자동화 시스템은 잘 관리가 된다면 가게 입장에서 무척 편리하겠지만 마치 챗봇이나 ARS 고객센터 같이 어딘지 모르게 디테일이 부족하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키오스크의 편리함으로 라떼에 우유 양을 조절할 수 있고 원한다면 시럽을 넣을 수도 있지만, ’덜 뜨겁게‘와 같은 미묘한 요구를 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사람만이 약간의 허전함을 채워줄 수 있습니다.


사람과 기계, 상호 보완


마케터로 일하며 종종 업계 동료들로부터 ‘AI가 우리 직업의 위기’라는 이야기를 듣는데, 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기계가 잘하는 일은 기계가 하고, 사람은 더 남아돌 많은 시간에 좀 더 사람다운 일을 하면 되는 것’. 참 속 편한 이야기일 수 있으나, 창작의 영역에선 여전히 사람이 프로세스 전반을 관리하고 로봇에게 실행(혹은 초안)과 추출을 맡기면 품질이나 효율에서 무척 좋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료 수집과 문장화는 AI가, 보정과 살을 붙여 완성은 사람이 하는 식이죠.)


조직문화 업무를 할 때에도 예전보다 조금 더 많은 시간을 기획에 할애할 수 있었던 것도 여러 디지털 협업과 소통 툴 덕분이었습니다. 피그마와 노션으로 협업하고, 아임웹으로 블로그를 쉽게 만들고, 슬랙으로 소통하니 회사가 추구하는 문화적 가치는 그 전파 속도가 무척 빨랐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하는 일은 직접 직원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1:1이나 팀 면담, 모여서 하는 아이디어 나눔입니다. 그리고 직원들이 꼭 알았으면 좋겠고, 놓치지 않아야 할 이벤트 공지는 종이에 인쇄해 공간 곳곳에 붙여둡니다.


사람의 역할


로봇이 커피 제조에 서빙까지 하는 한 카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얼핏 들으면 무인 카페 이야기 같지만, 사람 점원도 근무를 합니다. 다만 이 카페에는 독특한 시스템이 있는데, 바로 '사람의 역할'입니다. 이 카페에서는 로봇이 커피를 제조하고 대신 사람 점원은 바에서 손님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눈다고 합니다. 물론 조용히 커피만 마시고 싶은 손님에게는 그 시간 또한 존중하여 방해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사람다운 일을 하는 셈입니다.


AI가 지혜로운 마케터의 훌륭한 도구가 되듯, 우리가 머무는 공간도 좋은 시스템으로부터 확보된 시간에는 인간미 있는 소통이 더 많은 문화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날 문을 닫은 그 카페가 얼른 디지털 가속화 시대에 몇 남지 않은 아날로그 휴식처로 다시 돌아오길 바라며.



이전 03화 속도 보다 밀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