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드 바이블 2-1, '광장' 이야기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 마태오 18,20
녹색 대문에는 작은 쪽문이 함께 있었습니다. 단단한 철 문살 사이에 작은 손을 넣으면 안에 달아둔 줄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그걸 당기면 열쇠 없이도 문을 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꼬마였던 나는, 문을 열고,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참는 웃음을 잔뜩 머금고, 슬금슬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살금살금, 조심조심.
오른쪽엔 고추와 토마토밭이, 왼쪽엔 앵두나무와 조롱박 넝쿨이 있었습니다. 아, 앵두나무가 대문 오른쪽이었던가요? 가물가물합니다. 그래도, 그렇게 마당을 지나는 동안이 참 즐거웠다는 건 사실입니다. 저 앞에 계단 몇 개를 오르면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문. 현관문을 열면, 어린 손주를 반기며 두 팔을 벌려 안아주시는 할머니의 환한 미소가 있으리란 행복한 기대가 가득했으니까요.
마당이 넓지 않았기에 열댓 걸음이면 닿는 짧은 길이었지만, 할머니를 놀래킬 마음과 행복한 상상을 품기엔 충분한 거리였습니다. 겨울이면 할머니께서 마당 한 곳에 묻어둔 항아리에서 김치며 장아찌를 꺼내시고, 여름이면 마당에서 수박을 자르고 고기를 구워 가족이 둘러앉던 공간.
대문과 현관문 사이 그 마당은, 추억의, 만남의, 그리고 사철 지지 않는 이야기 꽃 핀 ‘우리의 광장’이었습니다.
우리 성당은 최근에 성당 앞마당 공사를 했습니다. 그동안 문제가 있었던 배수로를 고치고, 깨져 자칫 위험할 수 있었던 바닥 돌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은 ‘성요셉 광장’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름 하나 붙였을 뿐인데, 수없이 많은 발걸음이 스치고, 머물고, 다시 떠났던 이 자리에 어느덧 의미가 깃들었습니다.
이제 이곳은 고백의 광장, 회개의 광장, 믿음의 광장, 그리고 사랑의 광장이 되었습니다.
광장(plaza, pietro)은 넓은 공간을 뜻합니다. 그래서 광장은 어디에든 있습니다. 성당 앞마당처럼, 우리 문화 속 오래된 풍경들 곳곳에 ‘진실한 만남이 시작되는 공간’은 광장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광장은 여유이고, ‘틈’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성당의 광장도, 절의 일주문과 대웅전 사이의 길도, 오래된 한옥의 마당도 모두 틈이자, 관계입니다.
밖과 안, 세속과 진리, 처음과 깊이 있는 관계의 틈. 혹은 사이. 사람들은 그 광장에서 멈추고, 나아가고, 먼지를 털며 마음을 고요히 정돈합니다.
비어 있어서 더 풍성하고, 모든 것을 감싸기 때문에 따뜻한 공간. 삶과 신앙, 일상과 초월 사이를 부드럽게 이어주는 그 ‘틈’의 자리에, 우리는 때로 머물고, 때로 건너며, 때로 돌아옵니다.
신부님은, '아이들이 뛰어놀고, 낯선 이도 편히 머무는'그런 광장을 꿈꾸셨습니다.
어느 주일 햇살 좋은 날.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서로를 부르며 뛰어가는 몸짓을 보며, 신부님의 꿈이 드디어 현실의 문을 열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주임신부님은 부임하시자마자 성당의 곳곳을 돌보았습니다. '사람이 모이고, 머무는 성전의 모습은 아름다워야 하고, 그 공간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요. 그 정성의 씨앗은 아무도 모르게 무럭무럭 자라 사철 지지 않는 꽃을 피워냈습니다.
성전 제대 앞에는 매 주일, 그날의 미사 주제를 담은 꽃이 놓입니다. 성당과 꽃을 사랑하는 신자들이 모여 만든 헌화회는, 매주 수준급 플로리스트 못지않은 작품을 준비합니다. 이번 주임신부님은 ‘늘 하던 대로’나 ‘무조건 화려하게’가 아니라, ‘꽃을 통한 복음’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헌화회는 매주 말씀을 담은 꽃을 기도로 엮습니다. 헌화회에는 예쁘게 꽃을 꽂는 손 이전에,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기도의 손이 있습니다.
*묵상(默想): 어떤 대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성찰하는 행위
성당 1층에는 만남의 장소가 있었습니다. 테이블 몇 개가 놓여 있고, 한쪽에는 성물방(교회에서 성경, 서적, 십자가, 묵주 등 ‘성물’을 판매하는 공간), 그리고 오래된 자판기가 있던 공간은 마치 옛 동네의 시외버스터미널 같았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그 공간을 리모델링하고, 봉사자들과 함께 작은 카페를 열었습니다.
밖으로 향한 가벽은 허물고, 날이 좋을 땐 광장과 이어지도록 열린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그 카페에선 커피를 비롯한 다양한 음료를 준비하고, 수익금은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있습니다. 카페로 인해, 미사가 끝나면 신자들은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카페에 들러 삼삼오오 모입니다. 커피잔을 사이에 두고 오가는 웃음과 대화가, 꽃처럼 피어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사계절 지지 않는 꽃이, 광장을 중심으로 핀 성당이 참 좋습니다.
<카페 드 바이블 II> 연재를 시작하며,
1편이 절실함의 숨 찬 출발이었다면, 2편은 잠시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는 시간입니다. 성당이라는 공간, 말씀의 의미, 그리고 사람 사이 관계에 대한 생각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다정하게 나누고자 합니다.
잃었던 길 위에서 성당을 찾은 지는 1년 하고 반, 세례를 받은 지는 반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 일상은 빠르게 흘러갔고, 교회의 시간은 그보다는 더디게 흘렀습니다. 믿음이 막 자라나 커지지 않았고, 삶은 여전히 시련입니다. 다만 믿음 속에서, 그것을 대하는 자세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 글은, 그렇게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회상이자, 하늘 한 번 올려다보는 묵상이자, 중얼거리듯 남기는 작은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