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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땅

카페 드 바이블 2-2, '성지' 이야기

by 케니스트리

'행복합니다,
마음속으로 순례의 길을 생각할 때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

그들은 바카 계곡*을 지나며

샘물을 솟게 하고

봄비는 축복으로 덮어 줍니다.'


- 시편 84,5-7


바카 계곡(Valley of Baca): 히브리어로 '바카'라고 불리는 눈물의 골짜기, 즉 고통과 어려움이 있는 곳을 상징하는 장소




할아버지의


선산을 포함해 여러 다른 장소에 흩어져 있던 조상님들 묘소를 용인의 가족묘로 함께 이장한 지 십수 년이 지났습니다. 그곳에는 유골 이외에 어떤 의미 있는 것이 남아 있을까요? 혹자는 '죽음'의 기준은 생체 신호가 아닌 '기억'이라고 했습니다. 사자(死者)가 남겨진 이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지면, 비로소 삶이 다하고 죽음에 이르는 것이라고요.


“네 할아버지 평생의 소원이셨어.

그걸 이제야 이루네.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도 분명 좋아하실 거야”


아버지는 여전히 가족묘를 찾을 때면 아버지의 아버지이자 저의 조부님을 이야기하십니다. 반복되는 말씀이지만 매번 새롭게 들리는 것은, 아마도 그 이야기를 전하는 아버지의 진심과 그리움 때문일 것입니다. 오래전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일상 속에서, 또 여전히 나누는 부자간의 대화에서 살아납니다. 그렇게 우리는 가족묘를 찾으며, 아버지의 과거로 함께 여행을 떠납니다.


어쩌면 우리는, 가끔씩 추억이라는 공감 안에서 관계를 다시 돈독히 살피고자 그곳을 다시 찾는 것일지 모릅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공유하는 기억을, 선물로 그곳에 남겨줄 꿈을 꾸셨는지도요.


조상 묘 이야기가 나와서 말하자면, 가톨릭 신자로서 저는 종종 이런 오해와 마주하곤 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제사를 조상신 숭배라며 금기시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 가톨릭 교회는 문화적 다양성과 민속 전통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주술적 의미나 무속적 형식은 지양하지만, 조상을 공경하고 추모하는 일은 오히려 권장됩니다. 진정한 추모는 제사라는 외형이 아니라, 어떤 믿음 안에서, 어떤 마음으로 조상을 기억하고 기리는가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가 성지를 찾는 이유와도 닿아 있습니다. 성지 순례는 성인을 숭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받은 신앙의 유산과 문화의 깊이에 감사하고, 그 기억 속에서 마음의 쉼과 평화를 새롭게 맞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동행과 함께든, 나 혼자 여행이든, 간절한 기도든, 그냥 잠시의 쉼이든, 그곳을 찾거나 또 그리는 그 모든 일상이 '순례'입니다.



거룩한 사람,

거룩한 땅


‘성인’이라는 말에는 오랜 시간과 사람들의 공경이 담겨 있습니다. 거룩할 성(聖), 사람 인(人). 지혜와 덕을 갖춘 존재라는 뜻이지만, 가톨릭에서의 성인은 하느님의 뜻을 좇아 살았고, 죽음 이후 그 삶의 무게가 교회에 의해 거룩함으로 인정된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흔히 말하는 '모범적인 삶'과는 조금 다르게, 성인은 때로 고통스럽고 외로운 길을 기꺼이 선택한 이들입니다. 그들의 삶은 완전함보다는, 끝까지 놓지 않았던 믿음으로 남습니다.


초기 교회는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기억했습니다. 박해 속에서 신앙을 증언한 이들을 공동체는 특별히 기리기 시작했고, 그들의 무덤 위에 사람들이 모여 기도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는 이 전통을 제도화했고, 시복과 시성이라는 과정을 통해 성인의 이름을 공적으로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성인은 이후 하늘나라의 벗이자, 신자들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전구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성인은 과거의 인물이지만, 지금의 신앙 안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관계입니다.


그 성인을 기억하는 장소가 성지입니다. 신자들은, 성지는 단지 과거의 사건이 일어난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이 드러났던 자리이며, 인간의 응답이 시작된 땅이라고 믿습니다. 예루살렘, 베들레헴, 루르드, 파티마 같은 곳들이 대표적이지만, 그 의미는 장소보다 그곳에 스며든 믿음과 시간이 어떤 결을 이루고 있는가에 따라 다릅니다.


성지는 기억의 대상이자, 지금의 내가 기억과 연결되는 장소입니다.


새남터 성지 벽화 - 성인들의 초상


한국 가톨릭에는 유독 순교 성인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신자 수가 많아서도, 누군가의 특별한 선택 때문도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18세기말 조선의 유학자들이 스스로 경전 속에서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고, 마침내 한 사람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아 돌아와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역사적 특수성에서 기인합니다. 한국 천주교는 평신도로부터 자생적으로 시작되었고, 이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이름 없는 평신도입니다. 높은 지위에 있거나, 많은 이들의 공경을 받았던 이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소박한 일상을 살던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한국 가톨릭은 이들의 피와, 피가 스민 땅 위에 세워졌습니다.


전국의 수많은 성지에 들르면, 화려한 구조물이나 기념비보다, 조용한 언덕과 오래된 돌담, 바람과 나무가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줍니다.



새남터
성지


새남터 성지는 서울 용산구 이촌동에 위치한 순교 성지입니다. 조선시대의 형장으로 19세기 박해 시기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습니다. 현재 성지 안에는 성당과 기념비, 순교자 묘역 등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기와를 얹은 조선시대 전통적인 지붕의 외형이 인상 깊은 새남터 성당은 스물여섯에 순교한 조선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21 - 1846)의 마지막 자취가 남아있는 곳입니다.


좋은 날 간다면 바로 옆 철길로 기차가 지나는 소리가, 비가 오는 날이라면 또한 나름의 정취가 우리가 지금 이 땅을 밟고 서 있음에, 믿음과 함께하는 소중한 삶에 감사하게 합니다.


서울 이촌 새남터 성당



신리 성지


신리 성지는 충청도 당진의 작은 농촌 마을에 있습니다. 너른 들판에 우뚝 선 등대 같은 첨탑에 올라서면, 성지 전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습니다. 신리 성지는 19세기 중반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이었던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가 머물며 신앙 공동체를 돌보았던 장소로,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리는 당시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던 손자선 토마스 복자를 비롯한 평신도 신자들이 신앙을 지켜낸 교우촌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성직자의 직접적인 지도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공동체를 이루고 믿음을 전하며 살아갔습니다.


충남 당진 신리 성지


감사한 기회로 여러 성지를 찾았습니다. 각 성지는 저마다의 분위기와 이야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고통과 눈물, 상실이 머문 자리이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끝내 남아 있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성지를 찾든, 걸음은 조금 느려졌고, 결국 멈추어 내 삶의 지금을 가만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와 내 가족의 희생을 강요당한다면,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요? 솔직히 저는, 자신 없어요.”


언젠가 동행이 한 말을, 저 역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지금이라면,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때라면 어땠을까요. 지금보다 더 평등하고 거룩한 세상을 꿈꾸며, 영원한 삶을 위해 형장에서도 당당히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부질없는 물음이고, 알 수 없는 답입니다.


다만 앞으로도 가고 싶은 성지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그 답을 천천히 찾아갈 시간 또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위안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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