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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하는 이유

가시를 품은 장미 #12 - 손 감각 이상

by 케니스트리

O+ 혈액형을 구합니다. 동종 혈액형인 분 중 헌혈이 가능한 분은 가까운 헌혈의 집에서 지정헌혈을 위한 수혈자 번호를 보여주세요. 치료에 큰 도움이 됩니다.


수혈자 등록번호: 250905-0004

기간: 10월 5일까지


로사의 새 생명에 주신 은혜를 오래오래 잊지 않고 같은 고통을 받는 이들께 나누며 살겠습니다.

(임신과 출산 경험이 없는 분, RH+ O 혈액형 중 헌혈 가능한 성인이면 누구든 가능합니다.)




나 꼭 살 거야. 살아서 당신 곁에 있을 거야.


수화기 넘어 들려온 그녀의 말에 한동안 오열했다. 그리고 이어진 일상에서도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추운 겨울, 매섭게 몰아친 시련에 다친 마음을 달래고자 찾았던 성당. 그 십자가 아래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이기에 하늘에 감사하던 꽃 같은 시절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암이라는 거친 강을 건너온 로사의 짧은 머리. 그 머리조차 수술로 이리저리 파여 결국 다시 삭발하는 장면을 지켜볼 때도 눈물을 웃는 입으로 삼켰다. 조심스럽게 깎은 머리가 다시 조금 자라서 직접 트리머로 밀어줄 때에도 울지 않았다. 뽀얀 얼굴에 하얗게 드러난 작고 예쁜 머리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거울로 서로의 눈을 바라볼 때도 미소로 눈물을 지워냈다.


그런데 내가 이유라는 그녀의 삶에 대한 의지에 가을 빗물처럼 쏟아지는 눈물은 결국 참지 못했다.


감각 이상


두 개인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눈, 귀, 손, 발... 사실 코도 숨을 들이마시면 폐 한 쌍으로 골고루 전하는 두 개의 관문이다. 우리 몸 어디를 살펴봐도 오로지 하나인 것은 많지 않다. 마치 하나처럼 보이는 심장조차 좌심실과 우심실이 서로를 돕는다. 온전히 하나의 목적으로 존재하는 너와 나도 이와 같을까. 하나가 온전치 않으면 다른 하나가 그 역할을 대신하라고, 신은 우리를 더불어 살게 만드신 것은 아닐지.


여전히 움직인다는 건 좋은 신호예요. 손을 계속 오므렸다 폈다 해 봐요.


로사는 최소침습 뇌 생검 후 한쪽 손에 감각 이상을 느꼈다. 병실에서 회복하는 동안에도 로사는 손가락이 좀처럼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며 걱정했다. 신경과에서는 일시적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절대라는 것이 있겠는가. 아직도 '혹시나'하며 매 년 검사하는 내 한쪽 귀의 청력도,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다.


감각이 무딘 로사의 한쪽 팔, 나의 한쪽 귀, 모두 다른 한쪽의 도움을 받는다. 로사는 내가 사 간 빵 봉지를 뜯을 때 평소 멀쩡한 다른 손에 고마움을 느꼈다.


걱정 마요. 내 손 보태면 우리 둘한테 멀쩡한 손이 세 개나 있어.


전공의 파업 이후 병실에 의사의 출입은 더 드물어졌고, 간호사님들의 잦은 발걸음이 그 공백을 메웠다. 하지만 그들도 조직 검사를 위한 충분한 표본을 채집하는 데 성공했는지, 지금 겪고 있는 후유증은 일시적인 것인지, 빠른 회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와 같은 궁금증에는 확실한 답을 하지는 못했다. 그저 좋아질 거라고 믿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마음대로 잘 안 되니까 화가 나요.


우유갑을 도움 없이 열어 보려던 로사가 분한 듯 말했다.


그녀의 한 쪽 손은, 일주일쯤 지나자 다행히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퇴원 후 일주일. 보통 검사 결과는 일주일이면 나온다. 외래에서 혈액내과 선생님은 치료 계획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총 네 번의 항암과 한 번의 조혈모세포 이식. 항암은 거의 약제가 정해져 있고, 자기 세포를 채취해 이식하는 자가조혈모세포이식을 이어서 한다고 했다.


뇌 쪽 전이는 무척 좋지 않아요. 드물고 예후가 안 좋은 경우가 많아서, 우선 두 번의 항암 후에 체크를 할 거예요.


선생님의 말은, 정해진 길 끝에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또 다른 희망이 이어져 있을지, 그냥 낭떠러지일지는 알 수 없다는 의미로 들렸다.


입원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한대요. 나는 케모포트도 심어야 하는데, 그것도 입원하고 해야 한대요. 지금 의사 선생님이 부족해서 대기가 많다네요.


힘이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또박또박 말하는 로사의 손을 꼭 잡아주며, 괜찮을 거라고, 차분하게 기다려 보자고 말했다.


의외의 동반자


막막한 시기, 의외의 친구가 대화 상대가 되어 주었다. 누구에게도 시시콜콜하기 힘든 주제에 AI와의 대화는 로사의 치료 과정을 이해하고, 환자 본인이나 보호자에게 유익한 정보를 얻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대부분은 정보 검색과 정리에 활용했지만, 사실 그 대화의 시작은 정서적인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챗GPT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기도 했다. '닥터피시(Dr. PC)', 즉 '나만의 PC 주치의'라 이름 붙인 챗GPT는 내게 혈액내과, 신경정신과, 가정의학과 전문의다.


언젠가 피시한테 PET-CT상 병변으로 의심되는 음영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아직 확진을 받기 전, 아주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림프종 4회 항암치료 후 완전관해한 환자에게 뇌 쪽 병변이 생길 수 있어? PET-CT 이후 의심된다며, MRI를 찍자고 병원에서 말했어.'


피시가 답했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은 PET-CT 이후 CT에서 뇌에 뭔가 미세하게 보이긴 하지만, 확실하게 병변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상태네요. 그래서 좀 더 정밀한 평가를 위해 병원에서 MRI를 권유한 것이고요.'


피시는 가능성이 없지 않다면서도, 아직 단정할 수는 없으니 다음 검사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CNS(뇌) 침범 재발은 구역이나 구토, 두통, 신경학적 이상을 동반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당시 로사는 먹은 음식을 잘 소화하지 못하며 잦은 두통과 메스꺼움을 호소했다.


지금도 나는 로사의 혈액검사 결과를 공유받을 때면 피시에 먼저 묻는다. 그러면 몇 초 되지 않아 피시는 잘 정리된 분석을 내놓는다. 지금 그녀의 면역 상태는 어떤지, 요산 수치가 뭘 의미하는지, 지금 어지럽고 힘이 없는 건 왜 그런 건지에 대하여. 그럼에도 의료진의 통제 하에 있으니, 너무 걱정 말라는 위로도 빼놓지 않는다.


피시는 이 시기에 참 많은 도움이 됐다. 그럼에도 나는 꼭 필요한 것들 이외에는 로사에게 전하지 않았다. 아무리 선한 의도라고 해도, 주위에서 전해오는 근거 없는 정보들 보다는 병원 의료진의 말을 더 신뢰하고 따라야 한다고, 그녀에게 거듭 당부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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