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를 품은 장미 #14 - 긴 여정의 시작
'아무리 특이 케이스라고 해도, MTX(Methotrexate)와 Ara-C(Cytarabine) 고용량 요법에 이어서 강도 높은 컨디셔닝에 조혈모 이식까지,... 현재 환자의 혈관 상태가 너무 안 좋고 허혈성 지표도 뚜렷한데, 이 정도의 치료를 견뎌낼 수 있을까요?'
'지금은 방법이 없어요. DLBCL(미만성 거대 B세포 림프종, Diffuse Large B-Cell Lymphoma) 고위험군 인 데다, 특히 CNS(중추신경계, Central Nervous System) 침범의 예후는 본질적으로 불량해서,... 다른 장기로의 전이 가능성도 높으니 최대한의 치료는 불가피합니다.'
냉정함과 다정함이 9:1 정도로 섞인 대학병원의 협진 회의실에서 오가는 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로사는 아직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로 떠밀리듯 노를 저어 나아갔다.
조금만 천천히 가요. 같이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아요.
봄이라는 걸 사람들은 어떻게 알까?
어제까지 추웠다가 오늘 갑자기 햇살이 따뜻해지면, 그 하루만으로도 사람들은 '봄이야'라고 말하곤 한다. 꽃이 피는 찰나, 맑은 하늘, 조금 가벼워진 옷차림. 그 모든 순간들이 모여 하나의 ‘과정’이 되고, 그 과정은 또 하나의 ‘봄날‘을 만든다.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보통의 하루처럼.
첫 항암을 마치고 퇴원한 그녀와 가까운 공원을 걸었다. 예상보다 더운 날씨에 사람들은 식당 노상 테이블에 앉아 차가운 맥주잔을 들고 하루의 피로를 식히고 있었다. 문득, 나의 항암 시기가 떠올랐다.
항암 마치고 회복 중일 때였어요. 친구랑 오랜만에 나들이를 갔는데, 밖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시원한 아이리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침을 꼴깍 삼키자 친구가 눈짓을 하며 말하더군요. '왜, 한잔 할까?' 나는 웃다가 문득, '그 독한 항암제도 버텼는데, 맥주 한 잔이 대수일까. 그래, 나쁜 짓은 언제나 짜릿하지' 하며 펍(PUB)으로 걸어 들어가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었지요.
항암을 시작하고 반대로 세포가 알코올로부터 해방된 지 반년도 더 된 시기라서 인지, 몸 구석구석 찌릿찌릿한 희열이 느껴졌어요. 내가 죽을 길에서 살 길로 나아간 그때, 아직은 실감하지 못한 '나도 살아있다'는 증명과도 같았죠. 그건, 내가 세상에서 맛본 맥주 중에 제일 맛있는 맥주였어요.
손짓과 표정을 곁들이며 '그땐 그랬지'를 이야기하는 나를 애틋한 눈으로 살피듯 듣던 로사는 갑자기 조금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자기는 멋진 직장인 같은데, 난 너무 동네의 아픈 아줌마 같아.
뇌생검 흉터를 남에게 보이기 싫어 챙 있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면역이 약해진 탓에 마스크까지 착용한 그녀였다.
아냐. 지금 진짜 예뻐요. 얼굴에서 이렇게 광채 나는 암환자는 처음 봐. 근데 입맛 없다더니 왜 이렇게 볼이 통통해졌어요?
뭐? 안 그래도 항암 다이어트라도 기대했는데, 오히려 살찐 것 같아 속상하단 말이야. 지금 나 놀리는 거예요?
토라진 듯한 그녀 앞에서 크게 웃으며 아니라며 두 손을 저었다.
잠시 같은 곳을 바라며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우리도 다른 연인들처럼 아주 평범한 봄날을 걷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야기의 주제는 사뭇 달랐지만.
병원에 있을 땐 치료보다 그 공간 자체가 더 힘들었다. 통증은 약으로 조절할 수 있어도 마음의 무기력함은 도무지 어쩔 수 없었다. 그땐, 간절함조차 가질 힘이 없었다. 나는 시계의 초침이나 분침이 아니라, 그것들이 만나는 한가운데 점 같았다. 나를 중심으로 바삐 돌아가는 병동. 돕는 이들의 분주함과 다르게, 나의 시간은 참으로 더디게 흘렀다.
지금도 병원 안 어딘가에서 종점을 알 수 없는 암흑의 길을 걷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날 좋은 날 한 때, 이렇게 연인과 손잡고 공원을 걷는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귀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