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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감추는 방법

가시를 품은 장미 #16 - 혈액암 병동

by 케니스트리

나, 이번에는 꼭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예전에는 아니었고?


아니, 그땐… 나 정말 밝았거든. 주위에서 이상하다고 할 정도로요. 치료가 아픈 건 힘들었는데, 죽는 게 그렇게까지 두렵진 않았던 것 같아. 그냥 그날그날 병원에서 오라는 일정에 맞춰 가고, 치료받고, 입원하라면 하고… 노력했는데도 안 되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받아들였어. 그런데 지금은… 삶에 집착이 생겨. 자기랑 드디어 만나고, 사랑하게 됐잖아. 이 행복, 놓치고 싶지 않아. 나 꼭, 살아야겠어.


응, 꼭 살자. 같이 오래오래.


그 이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직도 소년처럼 짧은 머리를 한 그녀를 도닥이며 안아주었을 때, 심장 주위로 다시금 눈물이 차오르는 걸 애써 삼켜야 했기 때문이다.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도, 도리어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그녀에게 표정이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단절의 시간에 떠오른 과거의 예쁜 대화는, 잘 들어가지 않지만 결국 필요한 만큼 회복에 도움이 되는 로사의 주삿바늘처럼, 기다림 사이사이 기쁘게 파고든다.


고용량의 항암을 하는 여자친구 덕분에 난 체중이 늘었다. 항암 중에는 식욕이 없으니 늘 대충 먹게 되고, 항암제가 독하다 보니 조혈 기능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어 빈혈 증세로 어지러운 게 다반사인 로사. 만나서 식사를 하더라도 아주 조금 먹고 남은 음식을 내가 다 먹게 되니, 자연스레 체중이 붇고 몸이 둔해졌다. 데이트도, 집 근처 산책로를 함께 걷는 게 거의 전부였다 -그렇게 잠시라도 볼 수 있는게 얼마나 소중한 일상인지 그 때는 잘 알지 못했다.


항암은 한 번 입원을 하면 보통 3일을 내리 한다. 고용량 MTX(high-dose Methotrexate) 하루, 고용량 Ara-C(Cytarabine, 시타라빈)을 2일을 투여한다. 로사에게는 항암 전처치 1일, 본 항암 3일에 회복 기간 평균 4~5일을 더하여 1주일에서 10일까지가 한 사이클의 항암으로 정해졌다. 그렇게 네 사이클의 본 항암을 마치면, 조혈모 세포 이식을 위한 ‘전처치 컨디셔닝 요법’을 한다. 8일 동안, 세 가지 약제를 바꿔가며 몸속 혈관을 모두 깨끗이 하고, 최종적으로 조혈모 세포가 자리 잡을 골수 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 조혈모 시스템을 지우는 셈이다.


자기야. 나 머리 또 빠지는 거야? 어떻게 기른 머린데,.... 나 빡빡이라서 자기랑 결혼 못 하는 거 싫단 말이야.


그 어떤 소식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녀는 고강도의 항암 일정이 확정이 되자 눈물을 보였다. 암이 있다는 사실보다, 치료가 힘들다는 주의보다 머리가 빠진다는 소식이 더 슬프다니. 아이러니한데 재밌다고 느끼면서도, 나도 왠지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꼭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머리 없어도 결혼할 수 있어요. 혼배성사만 하자. 정 아쉬우면 가발 쓰면 돼. 근데 나는 자기 머리 없어도 괜찮아요. 예뻐.


한 번 겪을 때는 오히려 괜찮았는데, 두 번째에는 나 때문에 머리카락 빠지는 게 더 두렵다는 그녀의 말이 참 예쁘고 고마우면서도, 나라는 존재가 왠지 힘이 아닌 짐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아주 잠시지만 했다.


장기 입원 환자에게 병실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 게다가 혈액병동은 병실 내 외부인 출입이 사실상 금지다. 항암 치료 중에는 면역이 극도로 낮아지는데, 그러한 환자들 감염 관리 때문에 병원에서는 혈액암 병동을 전실 간호 통합 병동으로 운영하고, 더 많은 간호사가 오가며 환자를 챙긴다.


그래도 면회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환자들에게 병동 밖 외출이 전면 금지된 것은 아니어서, 같은 층 휴게실이나 편의점이 있는 병원 지하에서 만날 수 있었다.


오늘 피곤한데 오지 마요. 나도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서, 자기 봐도 별로 기쁘지 않을 것 같아.


아픈 이의 무기력함을 잘 이해하고 있기에, 오지 말라고 할 때 억지로 가지는 않았다. 그런 날에는 통화도 짧게 하고, 메시지도 마구잡이로 보내지 않았다. 어떤 날은, 나를 보면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오지 말라고 한 적도 있었다. 가만히 떠올려 보면, 사실 로사는 늘 병실에서 외로웠던 것 같다. 나보다는 남이 우선인 사람이라서 일까? 로사의 배려는 나의 소홀함을 만나 후회가 되었다.


병원에 있는 로사를 찾을 때에 우리는 주로 병원 2층에서 만났다. 1층부터 4층까지는 외래 병동이라서, 평일 낮에는 붐비고 평일 밤이나 주말 낮에는 한산하다. 2층은 휴게공간도 잘 조성되어 있고, 복도를 따라 걸으면 크게 약 200m 정도의 원이 그려져 산책도 할 수 있다. 몸을 움직여야 빨리 회복한다고 믿는 로사와 그 길을 종종 걸었다.


주사액 스탠드를 끌고 걷다 보면, 비슷하게 마르고, 머리에 두건이나 모자를 쓴 환자들을 마주한다. 모두 얼굴에 핏기가 없이 창백하고, 힘없이 걸었다. 로사와 같은 병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비슷할 거라고 생각은 들었다. 어떤 병이든, 그들 모두의 걸음이 치유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라며 걸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로마 5,4-5)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지금은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희년 메시지에 인용된 성경 구절이다. 가톨릭 전통에서 희년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하느님께 다시 시작을 허락받는 '라는 의미다.


희년은, 로사를 처음 만난 그 겨울 1월 1일에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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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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