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를 품은 장미 #15 - 항암 시작
너무 아파.
그 말을 얼마나 가볍게 여겼으면, 깃털처럼,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에 날려 곧 사라질 거라고 착각했을까.
어릴 때 나와 (특히) 남동생은 자주 아팠다. 머리가 아프거나, 배가 아프거나, 간혹 알이 배겨 다리가 아팠다. 하지만 아픔은 학교에 가지 못할 이유가 되지 않았다. '아파도 학교 가서 아파!'라며, 엄마는 손에 책가방을 쥐어주고, 내쫓듯 우리를 문 밖으로 떠밀곤 했다. 아버지와 (특히) 어머니는, 진짜 아프다는 의미를 잘 모르셨던 게 틀림없다. 그렇게 우리의 아프단 표현은 대체로 '꾀병'으로 치부됐다. 분명 아픈데, 왜 열은 좀처럼 나지 않는지, 의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꾀병이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꼭 잘 놀다가 하기 싫은 걸 해야 할 때면 아팠으니까. 하지만 분명한 건, 열과 기침이 나는 감기였어도 학교에 갔야 했다는 것이다. 그때 초등학교 저학년들 사이에 유행한 수두(varicella, chickenpox)라는 전염성 강한 질환이 있었다. 몸 여기저기 물집이 잡히고 열이 나는 대상포진의 일종인 수두에 걸려도, 물감 같은 약을 덕지덕지 바르고 학교에 온 아이들이 드물지 않게 있었던 걸 떠올려 보면, 아파도 학교에는 꼭 가야 하는 건 우리 집만의 사정은 아니었던 듯싶다. 그렇게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나는 결석 없이 졸업을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웬만한 아픈 건 잘 참고, 티를 잘 내지 않게 됐던 것 같다. 적어도 통증에 대한 참을성은 대단해 치과 치료도, 또 도수치료처럼 통증의 강도가 심한 치료도 곧잘 견뎠다.
내가 암을 발견할 당시에는 이미 꽤 진행된 상태였다. 조직검사 후 첫 담당 의사 선생님과의 진료에서 받았던 질문은 '통증이나 불편함이 없었어요?'였다. 그 무렵 자주 속이 울렁거리고 코피가 났다. 귀에 물이 차고 머리가 아파도, 그냥 두통약으로 수개월을 버텼다. 외국이라는 물리적 한계로 병원을 자주 찾지 못했고, 그렇게 버틴 시간 동안 병은 아무런 방해 없이 자신의 영역을 넓혀 갔다. 림프절 한 곳이 부풀어 오를 때도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다가, 반대편까지 부풀어 오르고 나서야 '이상한 느낌'만으로 고국으로 향했다. 그런 느낌이 비행기 티켓을 사게 한 것은, 정말 신의 가호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아프단 말에 안타까우면서도, 난 그걸 '충분히 견디고 버틸 만한' 아픔일 거라고 생각했다. 한 번 겪어 본 사람 입장에서, 돌이켜 보면 다 견딜 만한 고통이었으니. 신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시련만을 주신다는 (믿음 부족한 이의) 믿음이 착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 볼걸. 나는 그녀의 아픔에 그저 '조금만 더 참아 봐요, 금방 좋아질 거예요'를 반복해서 말할 뿐이었다.
아플 수 있지. 그래도 병원에서 더 아프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야.
그토록 공감하지 못했고, 이토록 후회로운 날들. 로사는 나와 비슷해서, 꾹꾹 눌러 참다가, 정말 아플 때 아프다고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받아야 할 치료는 나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고, 깊이가 다른 공포였다. 이제야 왜 그렇게 그녀가 병원에 가기 싫어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더 많이 공감해 줄 걸. 더 많이, 함께 아파해 줄 걸. 암이 아니라 항암제가 나를 죽일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
아픔에 대해 쓰다 보니, 거의 모든 이야기가 나의 반성이자 회고이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코린 1,26)
미카엘의 희망
어쩌면 그건 자기 위로의 다른 말일지 모른다. 희망(希望)은 쉽지 않은 것을 바라는 마음이라고 하던데, 나는 절망을 견디다 못해 억지로 희망을 떠올렸다.
잘 될 거예요. 분명히, 잘 될 거예요.
그리고 잘 될 이유를 찾고 또 찾았다. 그녀의 암종인 DLBCL은 빠른 공격성을 지녔지만, 약제에 잘 반응해 완전관해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녀도 완전관해의 이력이 있었고, 한 번 완전관해에 이른 이의 재발은 역시 장기 생존에 긍정적이라고 했다. 암이 머릿속 깊숙이, 좋지 않은 공간에 재발한 점은 분명 문제였지만, 그래도 그런 희망들에 집착했다.
너무 화가 나요. 선물을 주신 줄 알았는데, 어찌 이런 시련을 내게 또다시 주셨을까요?
첫 림프종을, 재발률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신약 임상에 운 좋게 들어가 수월히 치료했던 로사는 당시에는 그 병이 신이 겪게 한 일종의 순례라고 여겼다. '아프며 다른 아픈 이를 생각하라. 그로부터 삶이 유한하고, 더없이 소중함을 깨달아라'라는 가르침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고행에 대한 대가로, 신이 꼭 맞는 반려자를 선물로 내려주신 거라고, 로사는 나를 바라보며 행복해했다. 그러니 그녀의 원망은 이유 있었다. 어차피 오래 하지도 못 할 원망. 이내, 다시 그가 계획하신 징검다리를 건너야 한다는 것을, 로사는 무겁게 고개를 저으며 수긍했다..
두 번째 항암.
혈액 검사 결과도 시나리오 안에 있어 큰 문제없는 듯 보였다. 주로 보는 혈소판, 호중구(면역), 백혈구, 간 수치. 예상대로 내려가거나, 그에 대한 조치로 올라갔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시작은, 결코 수월치 않았다.
전공의 파업의 여파로 병원은 여느 때보다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고, 최근 증가세인 혈액암 환자들이 몰려 쉽게 병실이 나지 않았다. 첫 번째 항암 이후 3주 정도 후에 2차 항암을 위한 입원이 가장 좋다고 했지만, 계속 밀려 한 달도 더 지나 입원하게 됐다.
퇴원하면, 같이 산책도 하고 운동해요 우리.
로사의 치유 의지는 컸다. 나도 도울 마음의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힘들다고 할수록, 어느샌가 나의 말투가 격려에서 독려로 바뀌고 있었다.
목이 아파도 넘겨야 해요. 한 숟갈만 더 먹어요. 엔커버(영양액)라도 마셔요. 두 개 마셔요.
식욕도 없고, 힘도 없고, 무언가를 먹어 삼키는 게 너무 고통스럽다는 그녀에게 늘 그렇게만 말했으니, 얼마나 야속했을까. 가장 예쁜 모습만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스스로의 수난을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미안했을까.
내가 더 미안해요. 더 이해하고 공감해 주지 못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