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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불필요한 약

가시를 품은 장미 #19

by 케니스트리

이건 그냥 연민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성숙하기도 전에 만난 거센 파도를, 풋사과 따위가 극복할 리 없다며, 그게 사랑이라 착각하지 말라고도 했다. 나를 위한 그들의 말에 거부반응이 알레르기처럼 돋았지만, 나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는 누구도, 나와 같은 사랑을 해 보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믿었다. 그래도 그런 현실인지 오해인지 해석이 불가한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날 밤이면 어김없이, 이게 사랑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다시, 사랑의 처음으로 돌아가 그 단서를 찾는다.

사랑을 시작하면, 왜 처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벅찰까, 하는 물음을 다시 던져본다. 왜 그 열정이 스스로 지펴지고, 왜 사소한 말 한두마디에도 웃음이 나는지. 그게 사랑이야, 라고 누군가 말해준다면, 난 이제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래, 난 사랑하고 있어!를 외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걸 사랑이라 말하는, 그런 세상에 내가 살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몹시도 아픈 그녀가 잘 걷지도 못하게 되고, 말도 잘 하지 못하게 되고, 또 머리가 빠지고, 피부가 검어져도 난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이 모질어 야속한 시련이 가엾고, 또 어느 날 그녀의 조금이라도 나은 일상이 나를 웃게 하니까. 다시 정상으로,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 뿐인데, 그게 그리 행복할 일인가?

그건 그러고 보니 처음 사랑하던 그 때와 비슷한가 싶다. 별일 아니어도 마냥 즐겁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벅찼던, 한 때와 같이.

그건, 연민의 감정은 아닌게 분명하다.




로사의 두 번째 항암이 무사히 끝났다. 이번 항암 사이클은 아주 처음 시작한 항암과는 양적 질적으로 다르다 했다. 그래도 다행히, 흔한 피부의 각질과 탈모, 그리고 식욕부진 이외에 별난 부작용은 아직까지는 없었다.

매 사이클마다 항암은 3일을 잇는다. MTX(Methotrexate)를 하루, Ara-C(Cytarabine)를 이틀 투여한다. 이 일종의 항암 레시피는 뇌까지 전이된 혈액암에 흔히 쓰이는 치료 가이드라인에 따른 것이라 했다. 우리 뇌를 감싼 혈뇌장벽(BBB)이란 얇은 막은 생각보다 견고해서 웬만해선 이질적인 세포조차 들어가기 어렵다. 암도, 약도 마찬가지다. 로사의 장벽은 암세포에게 그 문을 열었다. 너무 밉지만, 어쩔 수 없이 이번엔 항암제에게도 문을 열어 줄 것을 간구해야 했다. 혈뇌장벽이 만만치 않아 센 약을 다량 넣어야 한다. MTX는 침투하고, Ara-C는 돕는 상호 보완 결사대.

이 병에는, 이 치료 프로토콜 외에 선택지가 많지 않다. 그래서일까, 자연스럽게 불안함은 성실의 계층 사이사이에 끼어들었다.

혈압 맥박은 정상인데 빈혈이 좀 있네요. 수혈해야겠어요.

주치의 선생님과 작은 소리로 뭐라뭐라 말하다가, 주치의 선생님이 다른 자리로 이동하자 남아있던 레지던트 선생님이 로사를 보며 말했다. 퇴원 전 수혈이 처방된 것은 지난번 항암과 같았다.

빠르고 건조한 회진은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너무 궁금하지만 주워담아야 했던 질문들.

이 치료가 효과가 없으면, 그땐 어떻게 해요?

치료 과정 중 가장 불필요한 약. 이제 와서 만약이란 질문은 신에게조차 하면 안된다고, 나와 로사는 암묵적으로 맹세했다.




미카엘의 편지

마음의 여유란 뭘까요. 마음이 얼마나 광활해야, 여유라는 것을 가질 수 있을까요.

정해진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우리는 그걸 좁다고, 또 넓다고 할까요.

그 크기를 가늠할 수는 있는 걸까요.

그런데 내 마음도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것 같아요. 아주 속이 좁게 행동했다가, 또 아주 넓게 마음을 가지기도 해요.

그 크기가 언제 늘고, 왜 줄어드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쩔 땐 사소한 일로 잘 아는 이를 오해하고, 탓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또 어떨 땐 모르는 사람에게 무한한 믿음을 건네죠.

병실에서 내일을 알 수 없이 주렁주렁 생명줄에 의지한 처지에도, 누군가는 다른 환우에게 사과 반쪽을 건네요.

오늘이 영원하다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은 자기 것을 조금도 놓을 수 없어 차라리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하고요.

두 손 두 발 자유로운 내가 도움을 청하는 이를 외면할 때도 있고,

손이 자유롭지 않아도 등으로 무거운 문을 버텨

누군가에게 길을 열어줄 때도 있어요.

어쩌면 마음의 크기와 가끔 속좁은건 아무 상관이 없는지도 모르겠어요.

큰 집에 살아도 늘 여유가 없다는 사람도 있고, 작은 집에서도 서로를 아끼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밤은, 왜 힘들까요. 가장 힘든 당신을 위해, 너른 마음이 따스한 손길만을 내자고 한 다짐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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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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