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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Aug 09. 2024

님은 먼 곳에

괴물은 누구일까 _20

"폭풍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바로 가장 조용한 말이다. 

비둘기 걸음으로 오는 사고만이 세계를 이끈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중에서





P에 대한 전보조치 문서가 결재나던 2023년 12월 21일 오전 저는 우리 조직의 수장인 사무총장과 20여 분간 긴급 면담을 했습니다. 오전부터 극도의 긴장 속에 재외선거과장, 감사과 직원, 인사과 직원들과 연속 면담을 한 상태라 사실 제대로 된 면담이 힘들었죠. 하지만 병원에 입원한 P의 상태가 너무 심각했고, 과천 청사까지 온 이상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휴대폰으로 직접 전화를 걸어 총장님께 긴급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면담은 총장님과 저, 그리고 총장 비서관이 배석해 3명이 참석했죠.


저는 이번 인사조치의 이유가 시간에 쫓겨 졸속으로 이루어진 감사과의 '졸속 감사'이며, 오직 P를 중앙에서 몰아내기 위해 이미 답을 정해 놓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진행된 '부실 감사'임을 지적했죠. 사무보조원이 스스로 원해서 차량 동승을 허용한 것을 이제 와서 '강요'였다고 고발한 건은 감사 결과도 정식 징계 조치 수준도 안되는 경미한 것이었죠. 하지만 인사과는 이른바 감사과가 권고한 '분리조치'라는 구실로 P를 전보시키기로 결정하였고 이는 부당하다고 저는 항의했습니다. 소위 부당행위라는 그 '차량 동승'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해당 사무보조원과는 계가 달라져서 함께 일할 일도 없는 상황에서 '분리조치'라니요



하지만, 자세한 감사 경위도 제대로 파악해 보지 않은 사무총장은 P가 마치 무슨 성희롱 범죄라도 저지를 것처럼 '분리조치'는 당연하다고 주장하며 감사 사안에 대해 억울한 부분이 있어 보이는데 이는 이의신청이나 소청, 소송을 통해 다퉈 보라는 원론적인 답을 하시더군요. 당사자가 심한 충격으로 병원에 실려 간 상태에서  1주일 이내에 무슨 이의신청과 소청을 하라는 건지. 또 이의신청이든 소청이든, 행정심판이든 그런 행정적 구제절차는 통상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고, 설사 그런 구제절차를 통해 감사 결과나 인사조치가 번복된다 해도 이미 발생한 정신적, 신체적 피해와 명예가 과연 회복될까요? 또 그 지난한 쟁송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2차 가해가 발생할 것이고, 어차피 우리 조직의 감사과나 인사과의 전보심사위원회나 징계심사위원회 위원들이 행정심판위원회, 소청위원원회 위원들과 동일한 중앙 간부들로 구성된 상황에서 중앙 간부가 내린 결정에 대해 이들 기관이 다른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요?  



결국, 총장님의 이야기는 지극히 원론적인 뜬 구름 잡는 말씀뿐이었죠. "이미 내려진 인사조치는 번복될 수 없고, 감사 결과에 대해서는 소청이나 소송으로 다퉈라." 판사 출신답게 모든 문제가 법적으로 다투면 공정하고 효과적으로 해결된다는 소신과 믿음이 가득 찬 말씀뿐이었습니다. 

"다소 억울해 보이는 부분은 있다. 하지만 이미 내려진 감사결과와 인사 조치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결재를 했기에 번복할 수 없다."는 요지였죠. 그리고 덧붙이신 말씀은 이런 거였죠.

"공직생활하다 보면 이번 일보다 더 억울한 일 많다. 억울하더라도 좀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거다."


저는 이런 말씀이 우리 조직의 최종 인사권자로서 해야 할 말인가 듣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오히려 인사의 최종 책임자라면 단 한 사람의, 단 한 건의 억울하고 부당한 인사가 없도록 살펴보고, 문제 있는 인사라면 이를 적극 시정하려는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조직생활 하다 보면 억울한 일 많으니 참고 지내는 게 능사라니요? 힘없는 하급 직원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무심하고, 부당한 인사 조치, 졸속 감사를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면서 힘 있고 권세 있는 고위 간부들의 비리와 잘못에는 그리 관대한 이른바 '강약약강의 약육강식의 조직원리'를 부끄럼 없이 합리화하다니요? 




그렇게, 총장님과의 면담은 아무런 소득도 아무런 성과도, 아무런 약속도 없이 부질없이 끝나 버렸죠.

 설사 '분리 조치'가 필요하더라도 중앙 내 전보조치를 하면 될 것이지, 무슨 중대 비위도 아닌 '차량 동승' 가지고 중앙 외부로 방출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이는 음주운전이나 개인정보 유출 같은 중대 비위로 감사를 받고 중징계조치를 받은 다른 일부 직원들은 그대로 중앙에서 품고 있음에  비해 너무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 조치 아닌가 따져 묻자, 총장님도 역시 역정을 내시더군요.  

"태도가 왜 그러나냐? 내가 잘못했냐? 왜 나한테 따지는 거냐?" 하시길래,

"잘못된 인사문서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결재하신 게 잘못 아닌가요?"라고 재차 물었더니,

제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으면서 황급히 면담을 마무리하고, 옆에 배석했던 비서관은 저를 총장실에서 거의 쫓아내듯 밖으로 안내하더군요.


총장실 밖에 나가보니, 재외선거과장님과 감사과장이 마치 교무실에 불려 온 학생들처럼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서 대기 중이더군요. 하지만 총장 비서관은 저를 내보내기 바빴습니다. 걱정스럽고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재외선거과장님이 저를 배웅했고요. 당연히 저도 단 한 번의 면담으로, 단 한 번의 항의로, 단 한 번의 부딪침으로 단순하게 사태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죠. 


비록 성과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7급 주무관이 장관급 사무총장을 사전 조율 없이 독대해 면담한 일로 저는 우리 조직에서 간부들에겐 '싸움닭' 혹은 빌런의 이미지로, 직원들에겐 무서움을 모르는 '투사'의 이미지로 각인되었죠. 우리 조직의 최종 인사권자인 총장님의 인식은 한마디로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거로 요약할 수 있죠.  저는 "엎질러진 물을 다 주워 담을 수 없지만 최대한 주워 담으려고 최소한 노력은 해봐야 한다"는 거고요. 총장님은 기득권으로 확립된 기성질서를 뒤흔들 수 없다는 입장이고, 저는 잘못되고 부당한 부분이 있다면 기존 질서라도 과감해 무너뜨리고 바로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고요. 그래서 저에게는 부실한 감사에 의해 촉발된 부당한 전보조치를 시정하는 것이 '공정과 정의'의 실현이라면, 총장님에게는 7급 주무관의 개인적인 '생떼'에 불과한 것이었죠. 저와 총장님의 계급만큼 우리 둘 사이의  인식의 간극도 컸습니다. 총장님은 그 간극을 메우려는 조금의 노력과 일말의 의지도 보여주지 않았고요. 





"세상엔 억울한 일도 많고, 억울한 사람도 많으니 가서 배우자를 잘 위로해 주라."는 하나마나한 소리만 반복하실 뿐이었죠.  총장님은 먼 곳에, 너무 먼 곳에 있는 분이었습니다. 님은 먼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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