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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키뉴 Aug 23. 2023

마닐라

나:

(사진을 보여주며) 이거 봐~라~.


제이:

형, 얼굴 왜 이리 빨개요?


나:

이거 그때야. 노량진 수산 시장에서 소주 세 병 깐 날.


제이:

진짜 못생기게 나왔네요.


나:

나도 내가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제이:

근데 여기 여자친구분 옆에는 누구예요?


나:

그때 내가 말 안 했나? 그때 축구팀 친구랑 술 한 잔 하고 있는데, 아니 사실 이미 두 병은 마신 거 같은데, 아무튼, 그때 여자친구가 근처에 볼 일 다 보고 그거 끝났다고 식당으로 오겠다는 거야. 내가 술 좀만 덜 취했으면 오지 말라 했을 텐데, 이미 정신이 나가 있어서 “얼른 왕~” 이 지랄하면서 기다렸지. 지금 생각하면 꽤 걸렸을 텐데, 뭐 온다 하고 바로 내 옆에 앉아 있는 그런 느낌? 크크. 정신 많이 나간 듯.


제이:

애비 애미도 몰라 본다는 그 낮술이 맞네요.


나:

그니까, 크크. 친구랑, 나랑, 여자친구랑 그기 수산 시장 가면 꼭 먹어야 한다 카더라 하는 오징어 튀김집 가 가지고, 튀김 씹지도 않고 그냥 흡입하고, 크크. 맥주도 없었는데, 크크. 그날 왜 입 천장이 다 까졌나 했다, 크크. 그러곤 기억도 안나. 뜨문뜨문 나는…? 어떻게 어떻게 친구랑 빠이빠이 하고, 나는 여자친구가 멱살 케리하면서 지하철 타러 갔지. 지금 생각하니 미안하네. 너무 개소리를 많이 해서. 기억도 못할 개소리를, 흐흐.


제이:

부끄럽네요, 아으.


나:

아 근데, 노량진역에서 서대문역 가려면 여의도역에서 갈아타야 하잖아. 지금도 내가 어떻게 환승하러 갔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야 근데, 넌 오늘 여기 온다고 걸은 길 다 기억하냐? 사실 우리는 다 그렇게 까먹으면서 사는 거야.


제이:

연~설하시네요, 형님.


나:

다 그런 거라니까? 흐흐. 아무튼. 그래서 환승타러 가는데, 여자친구가 저기 뭐 이상하다면서 그러는 거야. 그래서 봤더니, 환승 게이트 있잖아, 그거 찍어도 돈은 안 나가는데, 아무튼 환승하려면 찍고 가야 하는 그 통로? 뭐 그런 거? 아무튼. 그기서 남자 어른 하나, 여자 어른 하나, 그리고 여자 꼬맹이 하나 이렇게 셋이서 낑낑대고 있더라고. 대충 봐도 엄마, 아빠, 그리고 딸랑구 뭐 이런 거 같던데. 한국인 같진 않고. 보면 동남아 그런 느낌? 아무튼 관광객인 거 같더라고? 근데 여자친구가 그런 거 보면 또 가만 안 있거든. 그쪽으로 가더라고. 그래서 난 세상이 쿵쾅거리는지 내가 쿵쾅 걷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자친구 따라 빨리 걸어갔지. 뛰어 간 거 같은데. 막, 팔랑팔랑거리면서. 그랬을 거야. 술 좀 됐잖아. 걍 신났음.


근데 여자친구가 영어가 짧아. 사실 한 번 입 틔우면 잘할 거 같은데, 그거 틔우는 걸 아직 어려워한달까? 아무튼, 그래서 내가 가서 영어로 말했지. 나 영어 좀 되잖아, 흐흐. 사실 뻥이고, 기껏해야, 잠깐만요, 이제 가세요, 뭐 이런 개 짧은 영어만 나불댄 거 같은데. 혀 꼬인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 외국인 가족이 카드 찍고 환승 게이트 지나려는데 계속 삐빅거렸던 거지. 그래서 그거 옆에 큰 통로에 벨 눌러 가지고 여자친구가 뭐라뭐라 말했던 거 같은데, 그러니까 열어 주더라고. 근데 그 문은 그냥 잘 열어 주는 거 같아. “저, ㅎㅈㅅ ㅈ ㅆㄱ요!” 막 이래도 열어 주는 거 같음. 안 들으시나 봐. 아무튼, 그래서 열어 줬어.


근데 여자친구가, 그거 이따가 또 삐빅거릴 거라 하더라고? 처음에 카드 제대로 안 찍고 들어오면 저게 카드 찍을 때마다 삐빅거린다고 하더라고. 내가 그 아빠한테 막 상황 설명하면서, 이따 또 안 될 수도 있다고 그랬지. 좀 맘이 불편하더라고? 불편했던 기억은 나네. 그래서 어디 가냐고 물었지. 여의나루역 간대. ‘한~리버’ 보러. 그래서 어차피 5호선이잖아? 서대문역 가려면 우리도 아무튼 그쪽 지나잖아? 그래서 같이 가자 했지.


“우리가 데려다 줄게요.”


처음엔 사양했었나? 괜찮다고. 근데 금방 고맙다 한 거 같다? 그럴 거야. 얼굴은 시뻘개 가지고 눈은 풀려 가지고 땀 냄새 풀풀 나는 얘가 웃으면서 말 건다고 생각해 봐. 막 같이 가자고. 난 거절 못할 거 같은데, 흐흐. 사실 기억이 잘 안 나, 흐흐. 아무튼 같이 갔어. 5호선 타러. 여자친구는 그 꼬맹이랑 같이 가고, 난 그 엄빠랑 같이 갔거든. 나 사실, 취하면 영어 좀 하거든. 이건 진짜다. 왠지는 모르지만 그냥 그게 되더라고? 취해 가지고, 나는 방금 축구하고 왔다, 우리 편은 졌다, 오늘 아주 중요한 경기였다, 그래서 슬프다, 뭐 이런…? 티엠아이…. 지금 보니까 계속 나 혼자 떠들었네, 스벌. 개 부끄럽네. 근데, 어디서 왔는지, 무슨 일로 왔는지, 뭐 그런 거는 일부러 안 물어 본 거 같은데. 졸라 구리잖아. 그런 게 왜 궁금하냐, 흐흐.


근데, 그기서 내가 마지막 결정타 날렸다, 흐흐.


“한국에 있는 동안 무슨 어려운 일 생기면 여기로 연락하세요. 제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그나마 조금은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러고 회사 명함 줬음, 히히히.


제이:

아니, 그걸 왜 줘요, 흐흐.


나:

몰라? 주고 싶었나 보지. 아! 아아아, 아니다. 그때 준 게 아니네. 그 전에 여의나루역 도착했다? 여의나루역 내려 가지고 이제 나가려는데, 그러면 카드 찍어야 하잖아? 진짜 여자친구 말대로 삐빅거리더라고. “거 봐” 하면서 여자친구는 꼬맹이 우리랑 있으라 하고 역무원 찾으러 갔지. 그 옆에 그 뭐냐 군부대 초소처럼 유리로 된 사무실 있고, 역무원 앉아 있는 데. 그기 가 가지고 역무원 부른 거지. 역무원 바로 나오더라고. 그런 일 있으면 따로 결제를 그 자리에서 하면 되는 거였더라고. 어디서 타서 여기까지 왔는지 그 자리에서 돈 내면 되는 거더라고. 그런 게 흔한 지, 역무원 나올 때부터 한 손에 기계 같은 거 들고 나오던데. 그거, 그거. 카드 포스기처럼 생긴 거. 그게 포스긴가? 크크. 역무원이 어디서 왔냐고 해서, 내가 어디서 왔냐고 다시 물어봤다? 강남역에서 탔대. 그러고 해피하게 다 같이 에스컬레이터 타고 올라 왔거든. 명함은 그때 준 거지. 초갠지 결정타 날리면서.


근데, 나 이건 안 쪽팔림. 술 마시고 막 들이댄 건 좀 부끄럽긴 해도. 거, 있잖아. 외국 갔는데, 현지인이, 너보다 조금이나마 더 그 바닥을 잘 안다 하는 그런 현지인이 너보고, “뭔 일 생기면 연락해라” 하면 기분이 좋겠냐, 안 좋겠냐? 난 좋을 거 같던데. 뭔가 무서운 한국땅이 좀 편안한 그런 곳이 되지 않겠냐, 이 말이야. 그래서 나도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라 한 거지. 그리고 명함 주면 내 이름 보여 주기도 편해. 그 사람한테 한국 이름이 쉽겠냐? 또, 어차피 제대로 말하려고 얼굴 가까이 대면 술 냄새만 나고. 그러니까 그 아빠도 자기 이름 말해 주더라고. 근데 사실 뭐라는지 몰랐음. 그래도 몇 번 따라 발음해 보다가, “아~~” 이러고 대충 마무리함, 흐흐.


그러다 보니 벌써 여의나루역 출구까지 다 왔더라고. 온 김에 밖에 까지 데려다 준다 했지. 이야, 여의나루에 사람 진짜 많더라. 좀 사람 없는 그런 적당한 자리쯤 가 가지고, “자 ~ 다 오셨습니다!” 이러고 소리지름. 신나는 척하면서. 근데 진짜 신난 거 같은데. 소리 지르니까 그냥 신나진 건지.


제이:

아~ 이 사진도 그땐가 보네요.


나:

어, 맞아. 이제 “안녕~” 하고 가려는데, 사진 한 번 찍자 하더라고? 그래서 그 꼬맹이랑, 나랑, 여자친구랑 이렇게 셋이 사진 찍었더랬지. 꼬맹이 키 맞춰 주느라 무릎 앉아 하고 있는 거 보이냐. 얘 이름이 소피래, 소피. 이거 아까 오전에 그 아빠라는 사람한테 받은 거야. 연락 올 거 기대하고 명함 준 거 아닌데, 명함에 있는 이메일 주소로 이메일 보냈더라고. 반갑더라. 사실, 이메일 안 봤으면 그날 그런 일 있었는지 까먹었을 수도 있음, 크크. 아무튼. 이거 봐 봐.


Hello Parquinho,

Thank you very much to you and your friend in helping us at the train station the other day. We appteciate it!
Let us know if ever you get to visit Manila/Philippines!

Kind regards,
R*** Re****
[감사합니다]


제이:

오, 끝에 한글도 써서 보냈네요.


나:

어어. 필리핀 사람이었더라고?  크흐, 야, 죽이지? 마닐라 오래. 오면 싹 다 해 주겠대. 싸악, 다!


제이:

그런 얘기 없는데요?


나:

아 그런가, 히히히. 그래도 그냥 식사 한 끼 정도는 대접해 주겠지? 나 필리핀 놀러 가고 싶단 생각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데, 갑자기 뭔가 가깝고 든든한 그런 느낌?


제이:

한 번 가셔야겠네요, 필리핀.


나:

막상 가면 쌩 까는 거 아냐? “이 색히 오라니까 진짜 왔네?” 이러면서, 흐흐.


제이:

“왔냐? 잘 놀다 가라.” 막, 이러면서, 흐흐흐. 근데, 진짜 이번 가을에 한 번 기획해 보시는 거 어때요? 이런 거 핑계 삼아 가는 거죠, 뭐.


나:

아니. 안 갈 건데?


제이:

왜요? 흐흐.


나:

가서 납치당하면 어떡해. <범죄도시> 강해상 같은 놈 만날 수도 있잖아? 그리고 그기 총도 막 쏘고 그런다던데. 너 디즈니 플러스 <카지노> 봤지? 차무식 같은 놈 만나면 어떡해. 맨하탄 것들이 하는 총놀이랑은 질적으로 아주 차원이 다른 거여!


제이:

형…. 차무식 나오는 데는 아길레스예요. 마닐라는 그기랑 많이 다르대요.


나:

오, 너 마닐라 가 봤냐?


제이:

아니요? 히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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