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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말랑 Oct 24. 2021

마지막 선물은 어떤게 좋을까?

죽음 준비

요즘 장례식 십분 스피치 쓰는 게 유행이래. 유서랑은 좀 다른 건데, 내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 딱 10분이 주어진다면 나는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을까. 생각하면서 글을 쓰는 거지. 우리도 해볼까? 좋아. 그리고 둘 중에 누구든 먼저 죽으면 상대방이 그걸 진짜로 장례식에서 읽어주는 거야. 재밌겠다. 남들 해본다는 거 좋다는 거 재밌어 보이는 것은 뭐든 다 실행해 보던 20대의 우리는 각자 글을 써서 나눠 가졌다가 서로의 죽음 앞에서 읽어주기로 했다. 그 순간이 그렇게 빨리 다가올지도 모른 채. 낄낄거리며 약속했다.


제주 돌담 아래 굴러다니는 2월의 새빨간 동백처럼 친구는 하늘로 갔다. 꽃잎 한 장 상하지 않았는데 그대로 모든 걸 툭 내려놓았다. 아직 우리는 장례식 십분 스피치를 나눠 갖지 못했는데 끝이 났다. 친구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목소리는 내가 평생 읽지 못하는 글이 됐다. 5년쯤 지나 친구와 했던 그 약속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 글을 써 보려고 했으나 단 한 글자도 써 내려갈 수 없었다. 하얗게 펼쳐진 화면을 앞에 두고 눈물만 흘렀다. 친구와 약속할 때 우리가 먹고 있던 과자 부스러기 냄새가 계속 맴돌았다. 텅 빈 파일을 닫고 다시는 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죽음의 무게 안에 갇혔다. 죽음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짐짓 모른 체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A의 작업실에 들렸다. A는 부채에 시를 옮겨 적고 있었다. 한 호흡에 한 줄씩 느리게 써 내려가는 동안 나는 턱을 괴고 앉아 붓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컴퓨터로 쓰는 글씨야 다다다닥 쓰다가 마음에 안 들면 지우고 또다시 쓰면 그만이지만 붓글씨는 다르다. 한번 획을 잘못 긋거나 먹물을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그러니까 쉿! 집중 집중! 서예를 잘하는 A의 글씨는 빛이 났다.


서정주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A는 붓을 내려놓고 말했다. 나중에 내 장례식에 올 사람들에게 줄 선물이야. 내 생의 마지막 선물로 내 글씨를 남겨주고 싶어. 나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좋은 글을 만날 때마다 부채에 옮겨 적어 두고 있어. 뭐. 이것들이 변색되고 찢어질 때까지 오래 살 수 있으면 더 좋은 거고. 그때 가서 다시 또 쓰면 되지 뭐. 내 장례식에 너도 초대할게.


내가 손으로 꼬물꼬물 빚어낸 어떤 것을 장례식장에서 마지막 기념품처럼 사람들에게 나눠준다니. 나와 영영 이별하는 날 주고 싶은 선물을 준비한다니. 나는 이렇게 멋지게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마지막까지 조용히 쌓아 올리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는 것도 근사하다.



이런 죽음 준비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완전히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시간을 그저 차곡차곡 쌓아가는 일이니까. 공장에서 찍혀 나온 것이 아니라 내 체온과 혼이 깃들어 있는 수제품이어야 한다. 내가 사라진 후에도 이 세상에 남아 나를 기억해 줄 사람들에게 건네 줄 작고 단단한 선물. 사람들이 책상과 가방에 두고 만지작거릴 수 있는 것들. 그때마다 나와의 어떤 추억 하나가 떠오르겠지. 어디서 살 수도 없고 다시 받을 수도 없는 거니까 그들은 닳을까 봐서 아끼고 또 아끼며 쓰다듬겠지. 그때마다 내 삶은 또 얼마나 애틋해질까. 얼른 시작해야겠다. 작은 상자를 준비하고 예쁜 구슬로 팔찌라도 엮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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