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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말랑 Oct 24. 2021

직업으로 해 보고 싶은 일이 있나요?

직업으로 해 보고 싶은 일들

TV에서 미녀 할머니를 처음 뵀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반짝이는 백발과 환한 미소였다. 꼭 미녀라고 불러야 한다면서 쑥스러운 듯 입을 가리고 웃으시는데 손끝의 빨간 매니큐어가 빛났다. 미녀 할머니는 고생스러웠던 세상사를 모두 내려놓으시고 분홍색 크레파스로 색칠공부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신다. 안타깝게도 5년 전 남편이 돌아가셨다는 것은 기억하지 못하신다. 영감이 요즘 하도 안 보여서 어디 가셨나 찾고 있다며 하하하 명랑하게 웃으셨다. 그렇다. 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셨다.


미녀 할머니는 박수 장단만 넣으면 어디서든 고운 가락으로 흥바람을 일으키셨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다가도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미녀 할머니의 치매는 전혀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도 은빛 백발과 빨간색 매니큐어는 빛났다.


나는 미녀 할머니의 이야기를 만나고 나서 나의 다음 직업을 품게 됐다. 치매에 걸리신 할머니들께 매니큐어 발라 드리기. 손끝에 자신이 원하는 색상을 입히는 게 할머니의 인생과 마음을 얼마나 화사하게 빛내는지 알게 됐기에 네일 아트를 배워 할머니들을 만나러 가고 싶다. 조그마한 가방을 펼쳐 놓고 형형색색 매니큐어 중에 콕 골라 집는 예쁜 색을 꺼내 그녀들의 손가락보다 가는 붓질로 손톱을 채워드리는 일. 그 시간 동안 조곤조곤 그녀들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나는 이 직업을 뭐라고 해야 할지 아직 이름을 정하지는 못했다.



오랫동안 직업이란 내가 돈을 버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즐거움이든 호기심이든 돈이 되지 않으면 그건 취미생활일 뿐이고 언제든 때려치워도 그만인 일들이라 여겼다. 이젠 조금 다른 생각을 갖게 됐다. 직업이란 내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다. 우리가 직업을 통해 얻는 게 꼭 돈이 아니라면 직업 선택의 폭은 훨씬 넓어진다. 할머니들에게 매니큐어를 발라드리는 시간들이 쌓여 돈 대신에 가치 있는 다른 것들을 나에게 줄 것이라 믿는다. 그러니 할머니들의 손톱을 가꿔드리는 일도 충분히 내 직업이 될 수 있다.


사진작가 조선희가 말했다. “난 지금껏 죽을 때까지 사진을 찍으며 살고 싶다고. 죽는 순간까지 카메라를 쥐고 있고 싶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인생을 세 단계로 나누어 직업을 세 가지로 바꿔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이미 다섯 번째 직업을 꿈꾸고 있으니 살아가는 동안 열 가지 직업을 갖고 싶다. 평생을 한 가지 일에 몰두하여 대가를 이룬 분들도 존경스럽지만 다양한 분야에 폭넓은 호기심을 갖고 있는 인생도 몹시 흥미롭다. 나는 흥미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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