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너무 많이 엇갈린다

사랑이 불공평한 이유

by ASTR

이 세상에 사랑이 제한되어 있다고 가정해보자. 100명 정도 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100개의 사랑이 똑같이 분배될까.


처음에는 똑같이 한개씩 사랑을 받는다. 그것은 남을 생각하는 [이타심]의 애정, 그리고 [자존감] 이라는 이름의 ‘나를 사랑하는 사랑’, 그외에 여러 색깔의 사랑들. 남을 위해 내어줄 수 있고 희생하는 사랑이며 또 스스로를 이해하는 사랑이며 풍파에도 ‘난 괜찮아’하며 버텨내는 사랑. 이 사랑 하나의 구성은 사람마다 다르고 성격도 다르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변화가 일어난다. 딱 한개씩 가지고 있는 사랑을 남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다. 반을 떼어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준다. 떼어준 사랑의 공백에는 그 사람이 준 사랑이 채워지기를 기대한다. 채워진 사랑이 원래 반개보다 적을 수도 있고, 많을 수도 있고 ‘관계’에 따라 종국에 나에게 남은 한개의 사랑에는 변화가 생긴다.


떼어주기만 하고, 사랑만 퍼주고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의 크기가 점차 작아진다. 그 말은 자존감이 작아진다는 것이고, 새로운 사람에게 나눠줄 사랑의 크기도 갈 수록 작아진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너무 많은 사랑을 받고 매사에 빛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누군가의 사랑은 계속 작아지고 심지어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무 작아져 있다.


그렇다. 사랑은 불공평하다.

그래서 우린 너무 많이 엇갈린다.


누군가에게만 관심과 사랑이 집중되고, 어떤이에게 관심과 사랑이 결여되는 건 확실히 기형적인 구조다. 나는 우리의 눈과 취향과 판단이 서로가 서로의 몫을, 소위 말하는 반쪽을 운명적으로 알아볼 수있을 것이라 믿는 편이다. 그것은 자연스런 ‘끌림’이며 그 끌림의 정체가 서로에 대한 채움으로 이해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실제로 실현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언가, 우리의 눈과 취향과 판단을 가리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우리를 엇갈리게 하는 것. 우리의 자연스런 끌림을 방해하는 것.


세상이 준 기준대로가 아닌, 획일화된 ‘이성의 모델’이 아니라 나와 사랑을 주고받기에 어울리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대신 그 동안 ‘미디어’가 보여준 허황과 같은 그림자를 쫒았다. 그리고 모두가 똑같은 그림을 그려왔다. 모두가 그 그림을 만나고 깊은 ‘이상’으로 꼽고 또 한쪽에서는 그 그림이 되기 위해 뼈를 깍으며 노력한다. 누군가는 사랑받고 누군가는 외면받는다.


이 기형적 구조에서 서로를 제대로 만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엇갈림으로 인해 치뤄야 할 비용도 엄청나다. 비용이란, 본인의 인생 그 자체다.


내가 나다움을 찾아가며 성장하듯, 내가 만나야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나’를 살펴봐야 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객관적으로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에게 맞는 상대를 볼 수있는 눈을 자력으로 기를 수 있다. 모두가 사랑하는 ‘아름다움’ 같은 기준이 아니라, 내가 발견하는 아니 나만이 찾을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볼 수 있는 눈.


우리가 세상에 속해 살아가는 이상,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순 없다. 시대가 주는 편견과 선입견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너무나도 불공평하다. 그 불공평함 속에서 우린 기형적인 ‘엇갈림’만 반복할 뿐이다.


사랑을 하트로 표현하지만, 사실 아니다. 사랑은 사람마다 수많은 모양으로, 모두가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다. 내가 반을 떼어줬을 때 내 반과 똑같은 모양을 줄 수 있는 사람. 많지도 적지도 않게 그저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사람.


그 사람을 우린 꼭 만나야만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