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로 휴재하기는 좀 그러니까 뭐라도
처음으로 가족에게 나를 커밍아웃한 날이었다.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이 아닌,
내가 '초예민자(Highly Sensitive Person)'라는 사실을.
'초예민자로 태어나 세상을 사랑하기까지'
매거진에서도 다루었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
감정들의 기류와 텐션, 부정적인 감정,
그 모든 것을 내 것처럼 받아들이고
고민할 수밖에 없는 성향인지라,
사람들과의 관계가 버거웠다.
누군가가 나의 인생을 표현하길,
'가시밭길 속에서 피어나는 장미'라고 했지만,
장미가 피어나기에 앞서
내가 흘려야 했던 무수한 피들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사람들이 무심코 던진 말과 행동, 그들의 생각,
그 모든 게 역겹고 버겁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장미가 꽃봉오리를 피워냈는지,
사람을 가장 힘겨워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건 사람이라고 할 만큼,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려 발버둥 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나는 사람이라는 존재를 깊이 미워했으며,
그런 그들을 싫어하는 나 또한 경멸스러웠다.
그리고 이건 가족에게도 똑같이 적용됐다.
나의 첫 기억의 시작은 유치원이었다.
대학시절 운동권이었던 아빠의 주체 못 할 혈기는,
결혼을 하고 나서도 꺼지지 않았는지,
화가 날 때면 잡히는 모든 걸 던져 부셨다.
나는 너무 어릴 적이라,
누군가의 잘못으로 시작된 싸움인지,
아니면 단지 상극이었던
두 사람의 성향 때문에 붉어진 것이었는지,
선명히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유치원 시절부터
엄마와 아빠의 싸움은 잦았고, 격화되었다.
나의 첫 기억은,
비좁은 집에서,
거실은 난장판이 된 채,
엄마는 방에서 울고 있고,
나는 불안에 떨던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
엄마는 어두운 밤에,
나를 데리고 아는 이모네로 도망쳤다.
또 시간을 뛰어넘은 어느 기억엔,
아빠와 내가 둘이 살고 있었고,
나는 유치원에서 놀다,
선생님이 불러 밖으로 나갔더니,
멀리서 겸연쩍은 표정을 짓던 엄마가 있었고,
엄마의 손엔
당시 유행하던 힐리스 운동화가 들려있었다.
나는 어릴 적 많은 시간을 홀로 보냈다.
맞벌이로 바빴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모님 때문에,
유치원 종일반의 마지막 문을 닫는 아이가 나였으며,
부모님이 오기 전까지는 늘,
친구들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유치원 건물을,
홀로 쏘다니며,
이런저런 상상을 하면서 놀았다.
많은 시간을,
엄마의 친구 할머니댁에 맡겨져 보내기도 했다.
그 집 앞에 있던 놀이터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부모님은 나를 위해
서로에게 향한 미움과 분노를,
어느 선에서 타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그 마음들은
결코 숨겨지거나 사라지지 못했고,
내가 중학생, 고등학생,
심지어는 대학생이 된 이후까지도,
꽤 자주 표출됐다.
"너를 다 키우면 이혼할 거야"라는 말을,
고등학생이었던 내게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던 엄마의 말에,
겉으로는 "그래. 차라리 이혼하고 편하게 살아."라고 태연히 말을 하면서도,
그날 나는 직감했다.
나는 어쩌면,
오늘 처참히 짓밟힌 나의 자존감을
회복할 수 없겠구나.
평생 이 저주가 나를 따라다니겠구나.
나의 예감은 적중했다.
이십 대 내내 나는 사랑을 갈구했다.
숱한 연애 속에서,
나는 미련한 사랑을 갈구했고 버림받았으며,
또 다른, 변하지 않을 사랑을 찾아 나서기를 반복했다.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끔찍하게도 처절히 외로웠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나를 혐오하고 미워하던 순간들이었다.
감사하게도 고통에 발버둥 치던 순간들 속에,
회복과 치유가 있었고,
나는 과거의 허물을 다 벗어 소각시키고,
새로운 옷을 입었다.
지금은 그들을 이해한다.
어린 시절 부모와 결혼이 처음이었을,
너무도 어렸던 그들의 고군분투를 이해한다.
이십 대를 즐기던 친구들과 달리
나를 키워야 했던 엄마의 외로움과,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이해받지 못한
아빠의 외로움을 이해한다.
하지만 때로,
나도 사람이기에,
오랜 기간 혼자였던 삶이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기에,
내게 보고 싶다며 자주 찾아오라는 부모님의 말이,
가끔은 버거울 때가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서로의 속마음을 터놓지 못한 채 살았고,
서로를 안다고 착각하며 살았기에,
함께 앉은자리에서 나눌 삶의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
계속 튕겨져 나가는 딸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님의 서러움과 서운함도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왜 이토록
부모님을 사랑하면서도 버거워하는지 깨달았을 때,
내가 어쩌다 초예민자가 되었는지를 알았을 때,
나는 만찬을 열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누구인지를 털어놓기 위해서.
부모님께 Q&A 책을 사드렸고,
숙제를 냈다.
하루에 하나씩 질문에 답하며,
나도 모르는 나를 알아가고,
가족이라는 이름하에 무지했던,
서로의 정체성을 알아가기 위해서.
만나기로 한 날,
나는 인스타에서 본 어묵탕을 만들기로 마음먹고,
어묵탕 재료와 다과,
다이소에서 산 머그컵을 사들고,
본가에 갔다.
본가에서 엄마와 함께,
어묵에 각종 재료를 썰어 채워 넣으며 요리했고,
가족이 오랜만에 다 같이 식탁에 둘러앉아,
오붓하게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고 나서,
우리는 몇 달간 서로가 고민하며 정성스레 답을 적은,
Q&A책을 꺼내 들었다.
준비해 온 다과와 차를 마시며,
우리는 서로가 적은 답변을 공유했다.
우리는 술을 빌려 속마음을 터놓는 직장인들처럼,
Q&A 질문에 의지해 서로의 마음을 꺼내놓았다.
처음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하며 알게 된 것은,
아빠는 생각보다 하나님을 굉장히 사랑한다는 것과,
문체가 힘 있고 강렬하다는 것,
그리고 엄마의 문체는 자신을 알아가는 발걸음이,
조심스러우나 진중하다는 것이었다.
나 또한 부모님을 잘 모르고 있었구나,
미안함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나의 이야기,
나의 예민함을 부모님께 터놓았다.
초예민자로 검사를 한 결과
23문항 중 21문항에 해당했다는 것과,
어릴 적 이런 성향이 나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나에게 혼자 있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지,
그런 성향으로 부모님을 외롭게 했다면
그건 내 진심은 아니었다는 것까지,
나는 나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아빠는 충격을 받은 듯했고,
갑자기 쏟아져 나온 말들이 버거워 보이기도 했으나,
엄마는 어릴 적 나의 일기장을 몰래 보고 난 후
이해가 됐다며,
그 당시 나의 저주 같았던 삶을 엿보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말해주었다.
한편으로는 나를 이해해 달라는 호소에 가까웠던,
그러나 정말 이해받길 원했기에 더욱 간절했던,
나의 불편한 마음을 여과 없이 내려놓고 나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하도 많은 말을 해서인지,
그럴 때면 으레 찾아오는 두통에 시달려야 했지만,
가슴 한편에 오래 묵혀두었던
숙제를 하나 끝낸 것 같았고,
그 비어 버린 자리로
바람이 통하는 듯 시원함과 동시에,
없어져 버린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꼈다.
이 날 하루만으로,
나의 모든 응어리가 다 풀어지고,
부모님을 아무런 버거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는,
그런 사기꾼 같은 호언장담은 하지 않는다.
다만,
오래 미뤄둔 청소를 한 번에 할 수 없듯,
차근히 묵혀 놓은 것들을 비워내다 보면,
언젠가는 아무런 걸림 없이,
내 비워진 마음에
부모님을 온전히 담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나를 나 또한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 작은 확신이 생겼다.
만찬의 힘은,
서로를 포기하지 않으려,
소매 끝을 붙드는 작은 힘에서 나올지도 모르겠다.
버거워 때로는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 잔잔해진 어느 시점엔,
버거웠던 이들을 하나둘 식탁으로 초대하는,
그리고는 한번 더 그들을 붙들어 보는,
그런 용기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휴일은 친구를 만찬에 초대하려 했으나,
둘 다 감기에 걸려 지독히 고생 중이므로,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추억으로 간직하는 기억을 꺼내 보았다.
휴재를 하기에는 좀 그러니까, 뭐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