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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영 Jul 04. 2023

그 좋았던 봄날에

메밀과 팥 그리고 목련 (가제) 

https://www.youtube.com/watch?v=2H5rusicEnc&ab_channel=Musicaparabodas1

지금 시간은 새벽1시, 전날 친구와 서촌에서 낮술을 마시고 저녁이 되기 전에 잤기 때문에 잠에서 일찍 깼다. 다시 자려고 노력을 해보았지만 원체 한번 깨면 다시 잠에 못 드는 편이라 부엌 앞에 멍하니 앉아 있다. 문뜩 그녀가 나에게 써준 지난 1년간의 편지가 생각이 나서 꺼내 보았고 입가에 달콤하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잠깐 회상에 잠겼다.      


베란다로 나가 시가렛 애프터 섹스의 [Starry night]를 들으며 담배를 물었다. 뿌연 연기가 밤하늘의 빈 공간을 채워나가는 것을 보며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고 다치지 않게 그리고 마치 고양이를 쓰다듬듯이 예쁘게 그려볼까 한다.      


지난 4월, 그녀의 성공적인 이직 축하를 위해 봄맞이 여행을 떠났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의 진한 여운이 남아서 그런 것일까? 나도 영화 속 주인공 가후쿠와 마사키처럼 목적지 없이 그리고 멀리 달리고 싶었다.  

    

새벽 3시에 서울에서 출발하여 섬진강의 아기자기한 물줄기 소리와 벚꽃길이 아름답다는 지리산 쌍계사를 지나 통영에 도착했다. 거의 12시간을 내내 운전만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머리만 대면 쿨쿨 자는 그녀와 함께 좋아하는 음악을 작게 들으며 달리는 기분이 좋아서 피곤함을 느끼지 못 했다. 이렇게, 이대로 차 안에서 아스라이 퍼져나가는 그녀의 베이비파우더 체취를 맡으며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 봄날의 정취는 회색빛 서울 생활에 지친 몸과 마음에 따뜻한 충만감을 가득 채워주었다. 비운의 천재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들으며 봄이 되면 바다에서 강으로 거꾸로 힘차게 오르는 송어처럼 분홍빛이 감도는 남도를 누볐다.      


봄날의 섬진강은 내가 어릴 적 자장가를 불러주며 아픈 배를 만져주신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생각나게 했다. 봄은 고요한 듯 하지만 그 속엔 힘이 있어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을 비옥한 옥토로 만들어준다. 마치 만물의 꿈틀거림을 표현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떠오른다.


우리가 갔던 때가 벚꽃이 만개했던 시기라 해 질 녘 무렵, 고즈넉한 동네에서 마주친 벚꽃은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물들였다. 왜 여러 예술인들 특히 [나의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쓴 시인 백석이 이곳을 사랑했는지 이해가 갔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해산물을 비롯한 음식은 산해진미와 같았으며 바다의 윤슬은 빛이 났다.    

 

그녀는 나처럼 많은 곳을 여행하지 못 했지만, 만약 서울이 아닌 다른 곳에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통영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당시 나는 공감하지 못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내가 통영을 그리워하는 것을 보면 이제야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이틀간 묶었던 호텔 옆에 윤이상 작곡가의 묘가 있었다. 통영을 떠나는 날, 선생님에게 소주 한 잔을 올리고 고인을 기렸다. 사실 난 이분의 이름과 동백림 사건 정도만 알지 그의 음악이나 후손에게 남긴 위대한 업적은 잘 몰랐다.      


통영 여행 둘째 날, 그녀와 통영 비엔날레 전시회를 보러 갈 때 시내 모퉁이에 있는 선생님의 기념관에 들렸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선생님의 책 <여보, 나의 마누라, 나의 애인> 한 권을 선물했다. 


이 책은 선생님에게 찬란한 명성이 있기까지, 가난하고 외로웠던 유학시절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그의 아내와 주고받은 수백 통의 편지를 엮어 만들었다. 절절한 편지 속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 유학 생활의 외로움과 생활고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빛나는 음악에 대한 깊은 사랑, 고향 통영에 대한 향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약 70년 전에 썼던 편지는 지금 읽어도 그 정서가 읽는 이들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손 편지를 주고받았던 아날로그 시대에 베를린에서 보낸 편지 한 통이 서울에 당도하기까지 서로가 2-3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애절한 마음은 SNS나 실시간 채팅으로 즉각적인 안부 인사를 나눌 수 있는 디지털 시대, 지금 세대의 감수성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이국땅에서 동양인이 느끼는 온갖 설움을 편지 한 통으로 달래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애달팠을까. 책 속에 나오는 대부분의 정서는 ‘사랑’이다.      


사람은 죽어 혼과 백으로 나뉘고, 정신은 우주 어딘가로 가겠지만. 그의 뜨거운 사랑은 아직도 남아 내 마음을 따뜻한 석양빛으로 채웠다. 만약 내가 죽어도 나의 사랑 역시 누군가에게 읽혔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생겼다.           



-2021년 10월 9일 평창동에서-      

모두가 잠든 사이 그녀와 나는 지인의 집을 나왔다. 우리는 평창동 한 바퀴를 함께 걸었다. 그동안 수 없이 다녔던 평창동, 늘 오갔던 길이었지만 그 날은 왠지 길이 상대적으로 너무 짧게 느껴졌다. 한 시간 남짓했던 우리의 산책이 끝났다.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며 간단한 인사를 하고 계단에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그 찰나의 1분을 놓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다가가 차 한 잔만 더 하자고 말을 건넸다.           


-Y씨는 인생의 가치 중 무엇을 가장 추구해요?

-사랑인 것 같아요, 준영씨는요?” 

-저는 지금 이순간 부터 사랑일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조심스레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며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사랑이라는 블랙홀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을지를.  나는 그렇게 그녀에게 딥 다이빙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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