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에도 오답노트가 있다면
회사원이라 쓰고 드라마 작가 지망생이라 읽는 일을 4년째 해오고 있다. 작가 교육원에서 만난 동료들과 스터디도 4년째 이어오고 있는데 서로 쓴 글을 합평하는 것보다 잡담을 더 많이 한다. 주말 오전, 한가한 카페 모퉁이에 앉아 최신 드라마부터 영화와 예능을 휘젓고 글쓰기에 대한 걱정과 격려로 마무리되곤 한다. 작가들이란 세상에 대한 할 말이 너무 많아서 글을 쓰게 된 사람들이 아닐까.
제작사와 계약해서 본격적으로 드라마를 쓰기 시작한 사람도 있고,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프리랜서 작가가 된 사람도 있다. 나는? 보시다시피 회사와 드라마, 두 마리 토끼를 잡기는커녕 연애 사업에 몰두하며 솔로 다이어리를 휘갈기는 중이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스터디 중에 기억에 남아 메모까지 해 둔 대화가 있어서다.
KBS에서 방영한 ‘나의 흑역사 오답노트’를 보고 만난 날이었다.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도도혜는 오답노트 쓰기를 강조하는 수학 선생님이다. 어디서 틀렸는지 알아야 해답을 찾을 수 있으니까. 학생들에게 오답노트 숙제를 내주기도 모자라 본인도 오답노트를 쓴다. 무려 흑역사 오답노트다.
그는 수능 출제를 위한 합숙소에서 첫사랑과 전남편을 재회한다. 두 명의 흑역사를 도망갈 수도 없는 곳에서 마주한 것이다. 질척대는 전남편과 자꾸만 다가오는 첫사랑 사이에서는 오답노트도 소용이 없다.
오답노트도 만들었는데 왜 자꾸 틀리는 거냐고 절규하는 그에게 다른 선생님이 말한다. 수학은 등급이 있지만 인생엔 없으니까 좀 틀려도 괜찮지 않냐고.
이후 도혜는 자신의 오답노트를 첫사랑에게 전달하며 다 읽고 돌려달라고 하는데……
주인공이 자신의 흑역사 오답노트를 전해주는 장면에 대해 스터디원 중의 한 명이 말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자기 흑역사를 보여주는 여자는 없을 거 같은데.”
나머지 사람들도 끄덕이며 그래서 이게 드라마라고 말하던 가운데 나는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꾸준히 인생의 흑역사를 기록해 온갖 SNS에 데이터로 남긴 사람, 그걸 제 손으로 직접 엮어 독립출판까지 한 사람이 바로 저예요. 말하지 못했다.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할 때도 많다는 걸 그렇게 잘 아는 사람들이 왜 썸남에게 자기 흑역사 보여주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냐 증말. 속상하다. 진짜!
누군가 내게 관심을 가질 때마다, 그 관심이 반가우면서도 반감이 들었다. 상상에 환상을 더해서 나를 생각한다면 모조리 깨 주고 싶었다. 좋아한다고 하면 날 뭘 안다고 좋아한다는 거지 싶었고, 사랑한다고 하면 도망쳤다.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어딘가 좀 부족하고 망가졌고, 엉망입니다. 감당하시겠어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내 독립출판물인 ‘방백’을 건넸다. 그 책은 이 전에 잘 되어가던 남자와 잘 되고 싶은 남자에게 선물로 줬지만 한 명도 제대로 읽고 온 적이 없었다. 오히려 책을 주고 나면 관계가 끝났다. 끝장내려면 이 책을 건네면 되겠군 싶어 이후로는 누군가가 더 좋아지기 전에 얼른 나의 글을 읽게 했다.
다시 잘해보고 싶은 첫사랑에게 용기 내어 자신의 흑역사 노트를 건네는 도도혜의 마음을 이해한다. 내가 이렇게 못나고 별로인 사람인데, 이런 나라도 괜찮냐고 묻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니까.
나는 당신이 좋아. 그런데 당신은 어떤지 모르겠어. 상처받았고,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 먼저 선수 치는 거다. 그래도 당신이 괜찮다고 하면 나도 괜찮을 거 같아서.
수학은 정답이 있어도 인생(사랑)은 정답이 없다. 이번엔 오답이었지만 다음엔 오답이 아닐 거라는 확신도 없다. 아마 또 다른 오답을 찍게 되는 게 인생(사랑)이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확실한 정답도, 오답도 없기에 내가 선택한 것이 정답이라 믿으면 된다는 거다. (정신 승리 같지만 효과가 있다. 적어도 속은 편하기 때문에.)
정답인 줄 알았는데 오답이어도 괜찮다. 드라마 속 대사처럼 좀 틀려도 점수가 깎이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쓴다. 모두 보아라. 나의 실패를! 나의 흑역사를! 끝은 창대하리니! 나는 좀 대기만성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