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내에서 나의 연애 고군분투기가 연일 화제다. 나는 입사와 동시에 연애 사업에 뛰어들어 정시에 퇴근하고 늘 누군가를 만나러 가야 했기에 회사 사람들에게 연애 사업 현황을 공유할 수밖에 없었는데 매번 실패 보고만 받던 부장이 어느 날 나에게 말했다.
“아영은 상대 남자가 아직 욕심을 못 버렸어. 그래서 아직 못 만난 거야.”
상대가 욕심을 못 버려서 나를 못.. 만났다...?
돌려 돌려 돌려 까기도 아니고 한 번 곱씹어야 완전히 이해되는 말에 발끈할 타이밍도 놓쳐버린 내가 반박할 말을 고르는 사이 부장은 한 마디 더 붙였다.
“아님 네가 욕심을 버리든지!”
언제까지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젠 정말 될 때까지 하는 거다.
30대의 연애는 뭐랄까. 1도가 모자라서 끓지 않는 물 같기도 하고, 끓는점 자체가 높게 설정된 상태인 거 같기도 하다. 웬만해선 설레지 않는다. 사회생활에 찌들어서인가, 연애에 쏟을 체력이 모자라서인가. 아마도 둘 다겠지만.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있기 때문에 효율을 따지게 된다. 시간을 써도 될 놈인가 아닌가.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겠지만.
웬만해선 끓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러면 시작이 어려워진다.
나는 운명론자였다. 지난 놈들은 모두 잔챙이일 뿐 운명 같은 만남이 예정되어있을 거라 믿었다. 될 놈은 언제든 된다고 하지 않나. 될 놈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가 해도 해도 너무 안 되니까 내가 될 놈이 아니라 안될 놈인가 싶었다.
운명을 기다리다 목이 빠지는 사이, 노력하지 않으면서 운명에 맡겨버리고는 비관하는 거 좀 비겁하다 싶은 거다.
연애가 아니라 모든 면에 해당하는 말 같기도 하다. 나는 자기반성도 빠르다.
가만히 앉아서 감나무에 감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순 없었다. 난 감을 먹기 위해 감나무를 흔들어 재낄 줄 아는 21세기 여성이니까!
남자만 만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열어야 했다. 운명은 없다. 개척하는 자만이 쟁취한다! 그런데 그거 어떻게 하는 거더라…?
효율을 핑계로 웬만큼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같은 사람을 두 번 만나는 일은 잘 없었다.
한 번의 만남으로 상대를 판단하기에는 상대의 외양과 나의 직감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제 외양으로 사람을 가리는 나이는 지났다고 자신을 설득해 본다. (쉽지 않다)
그렇다고 내가 눈이 엄청 높지도 않다. 이상형은 양세종인데 내가 수지가 아니어서 적절히 타협한 결과
키는 170 이상,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는 사람만 두 번씩 만났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 누굴 만나던 나쁘지 않으면 두 번은 만나기로 했다. 두 번 봐도 모르겠으면 세 번도 만났다.
그런데 왜 연애의 시작이 안 되는 걸까. 직감에만 의존했던 게 더 쉬웠던 거 같기도 했다. '나쁘지 않으면 만난다'는 전제를 깔아 두었더니 좋은 게 뭔지 모르게 돼 버렸달까.
나쁘지 않은 사람들과 두어 번 만나고 세 번째쯤엔 늘 도망쳤다.
장염이 걸려도 만나러 오겠다는 마음과 피곤한 아침엔 커피를, 회식 다음 날엔 숙취해소제를 주는 마음들이 가리키는 게 무엇인지 알면서도 모른 척하다가
그들이 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기 전에 도망쳤다. 나쁘지 않은 걸로는 안 되는 거였다. 아! 아무 감나무나 막 흔들면 안 되는구나!
내 절친한 친구 송파 일짱은 그런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너는 검정고시 시험 같아"
"왜?"
"모든 과목에서 60점은 맞아야 하거든."
그녀는 정말이지 폭력배였다. 팩트 폭력배. 송파 일짱!
과일 하나 살 때도 흠 있는 과일은 고르지 않고 담고 싶어 하는 것처럼 기준을 세워놓고 사람을 만나는 게 문제였다.
무엇보다 그 사람이 좋아서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연애하고 싶어서 사람을 만나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사람? 그거 어떻게 좋아하는 건데. 나는 고양이, 강아지, 마음 나눌 일 없는 무생물, 양세종, NCT만 좋아하는 오덕인걸!
나이가 들수록 지켜야 하는 것은 호기심인 거 같다. 내 터전 밖의 세상과 사람에 대한 호기심.
웬만한 사람은 궁금하지 않다는 오만함은 버리고, 평균 60은 넘어야 하는 연애 고사도 버리고
내 앞의 상대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마음이 필요했다. 장점은 크게 보고, 단점은 작게 보는 마음.
이제야 고백하건대 그런 마음을 가졌더니 누군가를 만나서 사귀기도 했다. 짧게 만나고 헤어졌지만 어떤 만남이든 흔적을 남겼다.
한 가지 장점이 다른 단점을 덮는 사람이면 되는 거라는 걸, 상대의 속도에 맞추지 못해도 일단 이끄는 대로 손을 잡아 보는 것. 마음을 여는 건 이런 것이었구나.
나는 더 이상 시작이 어렵지 않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