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후 염증에 좋다는 말에 ABC주스를 먹고 있다. 비트와 당근을 적당량 자르고 살짝 쪄낸 후 사과 반개를 넣고 물과 함께 갈아주면 신선한 주스가 탄생한다.
이틀 전 아침. 당근이 떨어져 야채가게로 향했다. 투명한 봉투에 담겨 천 원에 3개. 제주도 흙당근. 저렴하고 질 좋은, 이왕이면 큰 걸로 사 가야지 하던 찰나. 일반적인 당근의 모습이 아닌 두 다리를 곧게 뻗은 바지 입은 당근과 눈이 마주쳤다. 너무나 귀여운 모습에 주저 없이 구매했다. 강렬한 비트의 자주빛에 당근의 실체가 묻히기 전, 주방 타일에 기대어 기념 촬영을 했다. 그것은 분명 오렌지색을 띠고 있지만 청바지를 입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청바지. 데님(denim)은 내게 기쁨과 공포의 시간을 함께 선사하며 1년의 공백기를 갖게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렇듯 우연히 본 당근에게서
데님을 연상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당근마저 그 옷을 입고 있을 줄이야.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일종의 푸닥거리다. 오랫동안 움추렸던 몸을 피면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의식이다.
그것을 처음 만나 좋아하고 힘들었던 순간을 되짚어 보며, 걸었던 길을 바라보고 나아가려는 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