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할 수 있을까
출판의 단계에서 가장 많은 인내심과 전문성을 요하는 단계가 초벌 교정이라 생각한다.
글쓰기 훈련 기간을 거친 문학 작가들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저자 글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파일 상태의 초고 교정은 외국어 단어 암기처럼 지루하고 힘들고도 중요한 과정이다. 게다가 심혈을 기울이고도 작업한 표도 잘 나지 않는다. 본문 조판 후 교정할 때에야 그 수월함의 열매로 편집자 자신만이 느낄 수 있다.
문제는 일정에 쫓길 때 초벌교정을 대략하고 교정지를 딸기밭으로 만들 것인가, 시간을 끌더라도 깔끔하게 벌초를 할 것인가 망설이게 될 때다.
한 달에 한 권씩 출간일정을 지키기 위해 예전에는 대충 쓸고 넘겼는데 요즘은 디자이너에게 넘기기 전에 파일 상태에서 쥐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집중력을 흐트리는 방해 요소가 없더라도 초벌은 참 지난한 시간이다.
우리 인생도 어릴 때 초벌교육이 잘 되어 사회에서 바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출판처럼 인생은 예측가능하지 않기에 불가능할 게다. 무수한 변수들, 뜻하지 않은 사고들, 힘들게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갑작스런 실직 등은 초등교육에서 훈련시켜 주지 않는다. 겪어보고 살아봐야 아는 부분이다.
어머니 간호를 오래하며 극한의 고통에서 숨죽여 울어보고, 절망의 끄트막에서 고함도 질러보며, 감당할 힘을 키우며 일상으로 무난한 시간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나는 무척 강하고 성숙한 줄 알았다. 하지만 구멍 난 바가지처럼 성숙은 담아지지 않고 분노의 쪽박만 남는 경우를 많이도 겪었다. 이제 나는 힘들고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처량한 존재란 생각을 자주 한다. 삶의 독특한 초벌교정이 거쳤어도 창조주께 다시 디자인되어야 인간다움을 얻을 수 있음을 알았다.
나는 갓 초벌을 마치고 디자인 시안을 잡는 단계의 인생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