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중에 가장 유명한 이, 장진 감독
KBS <명견만리>에서 장진 감독의 강연을 보았다.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개그맨(장진 감독이 과거 유머일번지에도 출연했다는 걸 기억하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카메오 배우 등도 잘해내지만 강연 모습은 아나운서 못지않은 침착함이 강점이다.
일본, 이탈리아, 독일 현지를 직접 답사하며 고령사회의 청년 문제와 청년층을 향한 투자와 배려에 대해 노련하게 강의를 했다. 인문학자, 사회학자의 풍모를 지녔고, 경제 분야까지 언급할 때는 그만한 지식인이 또 있을까 싶은 내공이 보였다.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장진 감독은 연합고사 커트라인을 넘지 못한 학업 성적의 중학생이었던 사실을.
언젠가부터 내게 전문인과 비전문인, 돈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유로운 사람과 돈 문제에 고달픈 사람으로 나누어 보는 시각이 있음을 발견했다. 가장이고 나이 쉰을 바라보면서 장진과 같이 분명한 자기 위치를 갖고 있는 전문인이 부럽기도 하고, 그만큼 현실은 참 답답하게 죄여 온다. 어떤 성장기를 보내야 전문인이 될까. 공식은 없다. 친구 장진을 보면 선명해진다.
그의 내밀한 과거를 드러내려고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삶은 우리가 흔히 아는 공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예를 들고 싶고, 창작자로서 자신의 결기가 뚜렷한 장진의 지금이 있기까지 누구도 쉽게 예측할 수 없는 굴곡이 있음을 나누고 싶다.
나는 장진 감독과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앞뒤로 나란히 앉아 수업했고, 청소 시간에 반 전체가 손걸레로 함께 청소하고 마치게 한 담임 선생님 때문에 교실 앞 복도 구역을 같이 맡아 거리상으로 늘 가까이 있었다. 둘이 마음이 잘 맞아 딱 붙어 지내는 절친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기억에 선명한 친구였다.
학기 초 영어 시간에 선생님이 지난 밤 자기 전에 무얼 했는지를 영작해서 발표하게 한 숙제가 있었다. 중 2에겐 무척 어려운 숙제여서 1, 2등을 다투는 아이들 정도 해올 수 있지 싶었다. 선생님은 숙제 해온 사람 손을 들라 했다가 자신 있게 손 든 학생이 없자 아무 번호나 부르며 시켰다. 그때 장진이 지목됐다.
진이는 공부 성적은 별로였지만 자존감이 좋은 친구였다. 다들 지목받은 진이가 숙제 못 했다는 답을 할 거라 예상했지만,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어젯밤에 무얼 했는지 우리말로 발표하겠습니다."
선생님은 그러라고 하셨다.
"어젯밤 저는 '서세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술술 얘기해 가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는데 반 아이들은 "오!" 하며 감탄했다.
'서세원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뭐지? 심야 라디오를 듣지 않던 나는 그의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고등학교 때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듣기 시작한 나는 진이가 중 2때 들은 라디오 방송이 밤 10시부터 12시까지 하는 mbc fm였구나 하는 걸 알았다. 중 2 때 밤 10시에 라디오에 귀 기울이는 녀석이라니, 당시 나로선 숙제하고 잘 시간이라 뜨악했다. 1984년 중 2 남자 세계에선 연예인들이 심야 라디오 DJ라는 사실을 아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진이는 지금처럼 마르고 길쭉한 체형에 개성이 뚜렷한 친구였다. 일찍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몰입했고 문화적 감수성을 가지고 나름대로 즐길 줄 알았다. 젊은 교사 중에 대학 못가면 쓰레기 된다는 겁박을 중2에게 늘어놓는 수업도 있던 와중에 말이다.
6월에 야외에서 1박하는 야영 수업이 있었다. 2학년 전체가 서울 근교로 버스 타고 가서 엄격한 선생님들 지도하에 캠프를 열었는데 반 별로 야간 장기자랑 시간이 있었다. 진이는 우리 반 대표로 기타 치는 친구와 듀엣을 결성해 가요를 불렀다. 그리고 선생님들 안 보는 곳에서 몰래 캔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어디로 튈 지 모를 중2 들에게 안전사고라도 생길까 봐 야영지에서 윽박지르며 신경이 곤두서 있던 선생님들로부터 주눅이 들어 있던 나와는 딴판이었다. 학교에선 선생님께 순복하고 공부만 해야 하는 줄 알았던 조용한 모범생인 나는 장진의 그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런 일탈의 용기가 부럽기도 했다. 그때 맥주 맛은 뭐였을까?
3학년에 진학하면서 남녀 합반이던 중2와 달리 분반이 되고 진이는 내 옆 반으로 나뉘었다. 나는 200점 만점의 연합고사에서 190점 정도로 배재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고입 커트라인에 미치지 못한 친구들은 전수학교로 불린 K고로 진학했는데 장진은 그 학교로 진학했다. 장진의 지금의 성공을 보면 중고등학교를 상위권 성적으로 관리하다 명문대에 진학해야 잘 산다는 통념이 반드시 옳지는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내 친구들 중에는 전수학교를 거쳐 서울예전 연극과에 진학한 그가 가장 유명하니 말이다.
선지원후시험 제도의 학력고사를 마친 고3 말이었을 게다. 우연히 명일동에서 진이를 만난 적이 있다. 500번 종점 부근 어느 커피숍에서 한참 그의 얘기를 들은 것 같다(햄버거 집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내게 자신이 이끈 고교 연극반 얘기를 즐겁게 풀어냈다. 그의 고교 시절은 연극반 생활로 가득 차 있었고, 나는 교회 고등부 생활로 꽉 차 있었다. 주로 그의 얘기를 경청했다. 나 같은 옛 친구를 만나면 자신의 연극반 무용담을 들려주고 싶어 준비라도 한듯이 그치지 않고 얘기해 주었다.
그가 다닌 고등학교 위치는 한적한 도로 옆이었다. 그는 연극반 후배들에게 교실의 책걸상을 모조리 학교 밖 도로에 들고 나오게 해서 도로 위에서 그 책걸상으로 퍼포먼스를 일으켜 보라고 시켰다는 얘길 열정적인 눈빛으로 들려주었다. 중학교 때 야영지에서 캔맥주를 마시던 그의 모습을 볼 때처럼 나는 신기하게 들었다. 꽤 추상적인 이야기였지만 그의 열정은 세상을 향해 도전해 가는 창작자의 건강한 싹이기도 했다. 일반적인 학교 공부의 코스가 아닌 자기만의 확고한 세계에서 그는 이미 감독이 되어 자신을 연출해 가고 있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 준비를 할 때 장진과 친했던 중학교 친구를 만난 적 있다. 경범이란 그 친구를 마씨라는 별명으로 부른 기억이 난다. 마씨는 내게 TV에 장진이 나온다고 해서 어느 프로냐고 했더니 유머1번지의 한 코너라고 했다. 맙소사! 내가 즐겨보던 코너였다. 나는 TV에서 장진의 개그 코너를 보면서도 그인 줄 몰랐다. 당시 그는 군대에서 쓴 희곡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작가로서 글 잘 쓰는 연극과생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덕에 유명 개그맨 선배들에 의해 방송계에 진출해 있던 중이었다.
케이블 TV 탄생으로 작가들이 모자란 방송계에 그는 월천작가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월천작가는 90년대 월수입 천만 원이 넘는 방송작가를 일컫는다. 게다가 당시 페미니즘 영화로 히트한 <개 같은 날의 오후>의 대본을 그가 썼고, 극 중의 작은 역할로 스크린에서 배우로도 나왔다. <동감> <간첩 리철진> <웰컴투 동막골> 모두 장진의 작품이다. <간첩 리철진>과 <킬러들의 수다> 등은 감독도 겸하여 장진 사단이 결성됐고 '필름있수다'라는 영화사도 설립했다.
주변의 연극, 영화 쪽 공부하는 친구와 후배들이 종종 장진을 가장 좋아하는 문화계 셀럽으로 말할 때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다.
2007년쯤 그의 희곡집을 출간하는 열림원에서 장진의 교보 강연회를 계획했다. 사전 신청자 100명 정도 받아서 광화문 경희궁의아침에서 장진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나도 댓글로 신청해 보았다. 그의 인기에 신청자가 많아 떨어질 수도 있었는데 행사 관계자로부터 참석자 명단에 들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당시 나는 대성그룹 홍보팀과 출판팀을 겸직하고 있었다. 퇴근 후 광화문으로 가면서 괜스레 장진이 나를 기억할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내가 <어머니는 소풍 중>을 출간하고 언론에서 화자될 때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 홈페이지 손님들 중에 자신을 기억하냐고 묻는 분들이 계셨다. 그 마음이 이해되었다.
강연장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앞자리에서 기다렸다. 객석이 꽉 찼을 때 장진이 보디가드와 함께 등장했다. 캐주얼한 차림에 여전히 마르고 허연 얼굴로 눈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는 앞자리의 나를 보는 동시에 "어! 너! 어떻게 왔어?" 하며 먼저 다가와 손을 잡아주었다. 강연 마치고 꼭 자기를 만나고 가라는 말과 함께.
자신이 영화, 연극계에서 일하게 된 일들을 특유의 유머러스한 말투로 강연하고 관련 업계에서 일하고 싶은 젊은 참석자들의 질문을 받은 후 사인회로 이어졌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안쪽의 대기실 방으로 데려가 반가워했다. 대학로에 사무실이 있으니 꼭 와서 연극도 보라고 했지만, 그날 나는 그의 개인 연락처를 묻지는 못했다. 마주할 시간도 짧았고 내가 먼저 따로 시간과 약속을 정해달라는 말을 건네지는 못했다.
그 후로 TV에서만 그를 만난다. 예능에서의 그도 빛나지만 명견만리 같은 시대적 문제를 짚고 대안을 제시하는 묵직한 프로그램에도 잘 어울린다. 중학교 때 학교 공부에 흥미를 갖지 않고 자기 세계에 몰입해서 시간을 쓴 그는 지금 지식인으로 통한다. 물론 공식처럼 말하는 진로와는 다른 길에서의 노력과 열정이 지금의 장진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아닌 남이 정해준 길에서만 답을 찾고 경쟁하며 괴로워하는 사회, 소수의 사람들만 목표를 이루는 길에서 실패하여 좌절하는 많은 피눈물 사회에서 지금 멋지게 활동하고 있는 장진이 참 도드라져 보인다.
중2 때 심야방송을 듣고, 무시무시한 야영 수업 현장에서 캔맥주를 마시고, 성적은 연합고사 인문계 커트라인을 못 넘겼어도 멋진 셀럽이 된다. 전국 1등만 하고 소년 판사로 등용되고 민정수석 자리까지 꿰차며 국정을 농단한 무리에 섞여 수사를 받기도 한다.
사회에 이로운 인물로 평가받는 인생은 공식에서 나오지 않는다.
2018.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