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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교진 Feb 04. 2019

순천향병원 감염내과 김태형 선생님

소풍 중인 어머니의 결핵을 치료해 주신 진짜 김사부




어머니는 2014년 현재 18년째 식물인간 상태로 계신다. 1997년 IMF가 터진 지 일주일 뒤 동대문 새벽시장에서 평소처럼 가게 문을 열고 일을 시작하시다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당시 두 곳의 대형 병원에서 수술할 수 없다는 통보에 급하게 작은 종합병원에서 뇌수술을 했지만 ‘기다려 봐야만 결과를 알 수 있다‘는 그 기다림이 17년을 지나고 있다.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대학원 진학을 정해둔 그때 나는 학업을 병행하며 어머니 간호를 해나가다가 중요한 수업이 몰린 주말에 병원에 달려와야 하는 일정으로 휴학을 했다. 경희의료원과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기며 회복을 소망했지만 결국 1998년 6월, 가망 없는 퇴원을 명 받아 집으로 모시고 왔다.

그로부터 8년 동안 나는 아픈 딸을 돌보는 가장처럼 식물상태의 어머니에게 모든 정신력과 체력을 쏟아부으며 그분의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안방에 병원침대를 두고 석션기로 호흡이 불편하지 않으시도록 수시로 석션을 하는 것과, 영양 관리, 위생 관리, 물리치료 등에 손과 발의 움직임이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는 일정에 들어갔다. 한숨이라도 제대로 편하게 자본 적이 없는 그 시간, 어쩌면 나는 현재는 알 수 없는 특별한 인생을 살도록 어머니가 이끌고 계시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 스스로도 지독한 불행이라 생각하지 않고 가족의 생명을 지키는 시간만큼 고귀하고 값진 것은 없다는 믿음이 좌절과 불안을 이기게 해주었다.

2004년이 되어 계속적으로 위협받던 경제적 곤란을 더 지고 갈 수 없게 되었다. 집을 내놓게 되어 더 이상은 어머니를 집에서 간호할 수 없는 시점에 들어와 당시 장기 요양환자들을 위한 시설이 하나 둘 늘어나던 때여서 적절한 곳을 찾아 어머니를 입원시켰다. 어쩔 수 없는 그 선택에 내 마음은 새로운 삶의 틈을 얻는 여유와 편리보다는 불행감이 더해졌다. 나는 끝까지 책임지고 싶었고 어머니께 어떻게 해드려야 할지 가장 잘 알고 있는 문제 해결자로서 이를 적용할 수 없다는 고통이 더 컸다. 물론 경제적인 문제도 만만치 않았다.

그때 국내 굴지의 출판사에서 우리 모자의 이야기를 담은 내 홈페이지의 글로 《어머니는 소풍 중》이라는 에세이를 사회 공익적 차원에서 출간시켰다. 우리 모자의 사랑 이야기는 이 책을 통해 조금씩 알려졌고, 나는 한 기업체의 홍보팀에 취직도 되었다. 어머니 병원비를 벌 수 있는 직장도 생겼고 뒤늦게 결혼을 약속한 배우자도 만나게 되었다. 아마도 어머니가 의식은 없지만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내 아내를 처음 만나게 된 계기는 “어머니 간호를 돕고 싶다”는 아내의 편지 때문이었으니까.

그 시기에 어머니의 요양병원에서 결핵 판정을 받았다. 아마도 오랜 투병 생활에 집보다는 불편했던 요양병원의 공동 간병을 통해 발병했다고 추측한다. 당시 나를 귀하게 여겨 주시던 삼성병원 소아재활 김현숙 교수님은 아끼는 후배가 순천향병원의 김태형 교수님인데 이 분야의 권위자이기 때문에 어머니를 순천향병원으로 옮겨 치료해 보라고 권해 주셨다. 나는 그 불안한 상태에서 경기도 이천의 요양병원에서 한남동으로 앰뷸런스로 옮길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오랜 질병의 환자를 간호하다 보면 병원을 옮기는 등의 뭔가 새로운 변화에 직면한다는 게 무엇보다도 마음이 힘들다. 돌아보면 그때 김태형 교수님 진료를 받았어야 했다. 나는 요양병원의 결핵 치료 시스템에 맡겨 전염성은 덜어냈지만, 어머니에겐 설사와 고열 등 지속적인 고통으로 작용했다.

4년 뒤 2009년 6월 어머니 결핵은 더 강한 내성으로 재발했다. 당시는 부천에 있는 한 기독 요양병원에 어머니를 입원시켜 드린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원장 선생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결핵 치료를 할 수 있는 병원을 연락해 보셨는데 멀리 마산까지 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주셨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다시 집으로 모시고 가야 하는 것과 빨리 대학병원을 알아보고 입원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신종인플루엔자가 유행하고 있어서 결핵균이 검출된 어머니를 병실 구석에 작은 스크린으로 가려두는 건 무척 곤란해했다. 나에겐 소중한 어머니지만 요양병원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옮겨야 할 분이니 마음이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그렇다고 마산의 결핵 치료 요양원까지 모시고 갈 수 없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어떻게 의식이 없는 중환자를 석션과 산소 공급을 해가며 마산까지 모시고 간단 말인가!

그때 교회에서 친해진 한 의사 선생님이 순천향병원의 김태형 교수님께 연락해 주었다. 가만 생각하니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아! 4년 전에 처음 결핵이 발병했을 때 소개받은 그 교수님 아닌가. 전화로 통화를 나눈 김 교수님은 급히 어머니가 입원하실 격리병동을 잡아 주셨고, 나는 마산에 내려갈 뻔한 어머니를 바로 한남동 순천향병원으로 옮길 수 있었다. 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간호의 여정에 이런 만남과 문제 해결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병이 고쳐지는 기적만 기적이 아니다. 투병 중에 길이 열리고 좋은 의사 선생님, 환자와 보호자를 배려하는 병원을 만나는 기적만큼 또 감사한 기적은 없다.

입원 전에 김태형 교수님의 진료실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김 교수님은 내 오랜 고통을 이해하시고 말이 아닌 마음으로 내 속의 억눌림과 답답함을 위로해 주셨다. 쉽게 치료할 수 있으니 걱정 말고, 오히려 병원에 맡기고 당분간 몸도 마음도 좀 쉬라며 격려해 주셨다. 나는 4년 전에 내가 소개받은 그 선생님과 동일한 분임을 알게 되면서 얼마나 소중한 희망이 생겼는지 모른다. 나는 당시 직장에서 나와 강의와 프리랜서 작가로 일하던 중이었는데 잠시 임시직으로 일한 곳이 한남동 부근의 출판사였다. 순천향병원에 내원하기가 쉬웠고 김 교수님과 매일 대화를 나누며 어머니 상태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한 조언도 많이 받았다. 어머니 결핵 재발은 지극히 불행한 일이지만, 김 교수님과의 만남은 내 인생을 윤택하게 해주는 귀한 선물이 되었다. 정말 1달이 안 되어 어머니 결핵은 치료되었다. 결핵 병동이 있던 층의 간호사님도 매우 친절하셨고, 1층에서 상담해 주신 직원 분도 따뜻하게 대해 주셔서 고마운 기억이 남는다. 일반 병실로 옮기는 과정에서 섭섭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잠시였지만 치료 기간 중에 안심했던 그 시간은 오래간만에 맛보는 내 인생의 휴식이기도 했다. 보호자인 내가 어머니 결핵 앞에서 휴식할 수 있다는 건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다.

어머니는 다시 요양병원으로 돌아가 간병받아도 안심할 만큼 호전됐다. 기쁜 소식이긴 하나 나는 또 어느 요양병원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가야 할지 막막했다. 우후죽순 생긴 많은 요양병원은 시설이 좋아 보여도 치료와 간호 등 의료 서비스가 미달인 곳이 수두룩하고, 극소수의 의료 서비스가 좋은 곳은 높은 비용 문제를 감당해 내야 한다. 결혼 후 아기까지 둔 내게는 계속되는 삶의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인터넷을 뒤질까 하던 중에 내 고민을 미리 아셨는지 김태형 교수님이 자신의 선배가 근무하는 부천의 가은병원을 소개해 주셨다. 미리 어머니 문제를 선배에게 전해놓으신 터라 내가 어머니 입원시켜 드리기가 매우 편하고 안심이 되었다. 아, 그때의 그 감동이란……. 나는 순천향병원에서 입원도 퇴원도 안심과 감동으로 채웠다. 요양병원은 1년이 지나면 옮길 수밖에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하지만 김 교수님이 소개해 주신 이곳 가은병원에서는 무탈하게 지금도 욕창 없이 깨끗한 몸으로 어머님이 잘 지내신다. 병원비도 많이 감면해 주셨고, 여러모로 우리 모자에게 감사한 병원이다.

2012년 가을에 어머니께 결핵으로 의심되는 증상이 또 나타났다. 내가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김태형 교수님이다. 감사하게도 김 교수님은 캐나다에서의 연구년을 마치고 귀국하셔서 순천향병원으로 복귀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부산에서 학술대회 중이셨는데 스마트폰으로 어머니 현재 상태를 확인하시고 격리병동 입원을 도와주셨다. 마음이 또 착잡하던 그때 3년 전에 겪은 일의 반복의 과정을 밟던 첫날, 격리실에서 마스크를 쓰고 어머니를 바라보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거닐던 마음이 금세 환해졌다. 부산에서 바로 순천향 병실로 찾아오셔서 허깅해 주신 김 교수님 덕분이다. 이런 일로 다시 만난 건 좋지 않지만, 다시 만나 기쁘다는 김 교수님 얼굴의 웃음에 내 마음은 일시에 어둠에서 빛으로 트랜스폼했다.

다행히 결핵이 아닌, 의심성 균으로 판정이 되었고, 김 교수님의 정확한 소견서로 다시 가은병원으로 돌아가 편안히 투병할 수 있게 되었다. 김 교수님과는 형님, 아우 사이가 됐다. 퇴근 후 매일 어머니 병동에 면회하며 교수님 방에 들러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그 시간, 나는 깊은 위로와 새로운 소망을 얻었다. 우리 모자가 앞으로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일상에 있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지금 어머니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등. 나를 정말 잘 알고 서로 신뢰하지 않으면 나누기 어려운 대화를 김 교수님과 가질 수 있었다. 나는 효자 소리 듣는 걸 원치 않는다. 그저 서로 사랑이 깊은 모자, 이웃에게도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 사랑의 진정한 모델이 내게는 김태형 교수님이다. 내가 가진 지식으로 공의를 베풀 수 있는 사랑, 가족에게 하듯 내 자신에게 하듯 환자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그 마음, 그러한 하트가 있으면 가장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병실에서 새로운 소망이 발아하여 세상을 따듯하게 보듬는 열매가 맺힐 것이다.

여전히 식물상태인 어머니와 함께 많은 일을 겪는 동안 가장 어려웠던 때 만난 순천향병원과 김태형 교수님 덕분에 최악의 절망 중에도 최선의 희망이 다가옴을 경험할 수 있었다. 병으로 고통받는 많은 이웃과 그 가족에게 ‘순’전한 위로를 전해 주시는 ‘천’사 같은 의료진으로 인해 ‘향’긋한 추억의 병상으로 자리하는 일들이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 김태형 형님, 고맙습니다!

2014.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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