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대학 진학을 위해 집을 떠나며 짐을 싸는 아들을 바라보며 절규하듯 엄마가 던진 한 마디. 영화 ‘보이후드’를 보고 나서 기억에 남은 한 마디이다. ‘보이후드’는 여섯 살 소년이 스무 살이 되는 12 년의 시간 동안 변화하는 소년과 그 가족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영화를 촬영한 기간도 12 년, 그 세월 동안 배우들이 화면 속에서 실제 성장하고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 고스란히 그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이 삶 속에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와보니 그 뭔가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이 텅 빈 공허함만이 가득하다. 자식은 이제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자신의 삶 속에서 그 ‘뭔가'를 찾아나갈 것이다. 그 뭔가가 도대체 있기는 한 건지 의심하는 나이가 될 때까지.
자식이 대학을 갈 무렵 부모는 중년을 맞이한다. 몸 바쳐 지켜내고 삶 속에서 구현해야할 간절한 가치가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자녀 양육은 앞 뒤 돌아보거나 삶의 의미를 공들여 물어보지 않아도 살 수 있게 하는 좋은 이유이자 삶의 무게가 되어 준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자녀가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자신의 품을 떠나는 시점이 다가온다.
삶 속에서 기대하거나 깜짝 놀랄 뭔가가 이제 그다지 남아있지 않다고 느끼며 나이 듦을 자각하는 때가 이때이다. 이 시점에 많은 사람들은 살면서 앞으로 무엇을 더 바라고,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 수 없게 느껴지는 ‘존재의 가벼움’을 마주하고 어쩔 줄 모르는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양육이라는 가치 하에 별다른 의미를 위해 살지 않아도 되었는데, 이제 온전히 본인이 마주해야할 뭔가가 필요해진 것이다.
자식을 독립시키는 부모는 열매를 떠나보낸 나무와 같다. 열매를 떠나보낸 나무 앞에 남겨진 시간은 잎마저 떨어지는 늦가을과 차갑고 시린 겨울, 안으로 파고들어 침묵하는 시간이다. 겨울은 칼바람으로 온 몸을 담금질하는 시련의 계절이다. 찬바람을 견디며 언젠가 다시 다가올 봄에 새싹을 틔울 수 있도록 겨울눈을 지키는 시간이다.
본격적인 겨울이 닥치기 전 서리가 내렸을 때 월동준비가 덜 된 식물들은 조직이 얼어버리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동사해버린다. 얼어붙지 않기 위해 나무는 물길을 최대한 줄여 수분을 최소화하고 여러 겹의 비늘껍질과 털, 부동액 역할을 하는 끈끈한 액체를 둘러 겨울눈을 보호한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열매를 떠나보낸 후 동사하는 나무가 되기는 싫다. 살아남아 꽃과 잎과 가지가 될 수 있는 새싹을 다시 틔울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내게 다가올 겨울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낼 것인가 하는 것이 오랜 시간 내 마음의 화두가 되었다. 나무의 겨울나기에서 보았듯 얼어붙지 않기 위해 내가 최대한으로 줄여야할 수분은 무엇이며 내가 보호하고 지켜야할 겨울눈은 또 무엇일까?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내일 아침 눈 떴을 때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싶은가?”
나는 답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더 나아지고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내가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원하는 방향으로 차곡차곡 걸어가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어."
어떤 나이로 살든 앞으로 더 나아지고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과 확신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힘이 된다. 더 나아지고 성장한다는 것은 외면적인 힘과 영향력의 확장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의 내면과 화해하여 평화로움을 지켜낸 스스로의 성숙한 모습일 수도 있다. 내 삶에 희망이 있으면 힘이 넘치고, 만족스럽고, 기쁘며, 안도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다. 희망이 없으면 무기력하고, 불만족스럽고, 우울하며, 불안하고, 공허하다.
살아 있는 겨울나무에게는 지켜내야 할 내면의 평온과 키워내야 할 싹눈이 있다. 아직 내 인생은 아름다운 초겨울이다.
씀바귀
베란다 화분에서 잘 자라던 씀바귀
잘려 식탁 위에 올라 왔습니다.
아, 억울해
씁쓸한 씀바귀의 중얼거림이 들립니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하루만 더 살았으면,
가을 햇살 풍요롭고
바람은 살랑 살랑,
떠나기 아쉬운 씀바귀가 쓴 물 떨궈 올립니다.
하루 더 푸른 잎사귀로 싱싱하게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