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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오래된 것들의 새로움

by 선향

토요일 이른 오후. 오래된 한옥 가옥들이 새 단장을 한 북촌 골목길에 자리 잡은 선재아트센터.

영화 '아티스트'를 보는데 눈물이 났다. 변해가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쳐져 있는 한 남자의 절망 때문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인 무성영화 시절의 잘나가는 스타인 조지 발렌타인이 유성영화를 본 후 보인 첫 반응은 비웃음이었다. 비웃었지만 그는 악몽을 꿨다. 소리가 없던 세상에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어느새 거울을 향해 외치는 자신의 목소리만 사라진 채 온갖 사물들의 소리와 사람들의 깔깔거림이 그를 에워싼다. 하늘을 날던 검은 깃털 하나가 바닥에 떨어지자 쾅하는 굉음이 울리고 그는 땀이 흥건해져서 잠을 깬다. 세상은 저만치 달려가고 어느새 자신은 세상보다 뒤쳐져있음을 알리는 전조였다.


자신의 성공방식에 취해있던 그는 시대의 흐름에 저항한다. 무성영화 시대의 식상한 얼굴들을 버리고 유성영화시대의 새 얼굴과 목소리를 찾는 제작사와 새로운 기술과 즐거움에 열광하는 대중에 맞서 자신만의 무성영화를 직접 제작하고, 감독하고, 주연으로 연기한다. 그러나 실패한다. 시대는 새로움을 원하고 그는 지나간 시절의 영광과 자만에 빠져 새로운 흐름에 올라타기를 거부하고 저항하다 결국 낙오하고 몰락했다.


영화에서 나를 울린 건 다음 세대에게 길은 내주고 물러나는 한물간 자의 서글픔이었다.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하는 세상에 발을 맞추지 못하는 자는 잊히고 뒤쳐지기 마련이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중년 직장인들의 고민도 이와 닿아있다. 그동안의 고민이 직장에서 인정받고 성과를 내기위해 고군분투하며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새로움과 변화를 요구하는 조직 앞에 자신이 새롭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입증해야한다.


소수의 탁월한 임원이나 관리자로 살아남지 못한다면 조직을 떠날 수밖에 없다. 이제 갓 서른이 넘은 패기만만하고 열정에 가득 찬 능력 있는 후배들이 가지지 못한 선배의 경험과 판단력이라는 것을 조직이 얼마나 가치 있게 평가할까, 스스로 의문이 드는 시점이기도 하다.


한 친구는 말한다.


"문제는 조직이 요구하는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는 거야. 자꾸 반항심이 들고 저항하고 싶은 거야. 내가 이제껏 나 자신을 입증하기 위해 얼마나 애써왔는데, 이제 다시 새로운 규칙으로 새롭게 시작하라고? 나이 들었다는 게 바로 이런 걸까? 후배들이 주목받으며 조직에서도 주류가 되어가는 모습에 나는 자꾸만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어."


이런 친구의 씁쓸한 읊조림이 무성영화의 영광에 매달려있는 아티스트의 주인공과 닮아있다. 낡고 오래된 것들이 풍겨내는 쓸쓸함과 서글픔에 공감을 느끼는 나이에 도달했다는 얘기이다.


주인공 죠지는 결국 여주인공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자살의 위기를 극복하고 탭댄스라는 신무기를 들고 화려하게 재기했다.


젊음의 영광이 퇴색해버린 우리에게도 '탭댄스'와 같은 마지막 한방은 분명히 숨겨져 있을 것이다. 오랜 방황과 절망 끝에 새로움을 입고 돌아올 수 있는 비장의 무기. 그것은 결국 내가 닦아온, 내 속에 이미 심겨져 있는 그 무엇일 수밖에 없다.


영화를 다 본 후 남편과 함께 낡은 한옥 가옥들을 새로 정비하여 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하는 새로운 얼굴로 재탄생한 북촌 거리를 걸어 내려왔다. 북촌의 새 얼굴이 그렇지 아니한가? 옛 것을 기반으로 새로움을 덧입은 얼굴. 그것이 바로 낡고 오래된 것들의 '탭댄스'였다.


흑백 무성영화의 형식으로 21세기의 아카데미를 석권한 영화 '아티스트' 역시 그렇지 아니한가?

낡고 오래된 옛 것에 새로움을 덧씌우고 거기에다 예술의 향기까지 입히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과제가 남아있다. 우리의 낡은 얼굴을 고풍스런 우아함과 격조로 드높일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각자 제 속에 깊이 뛰어들어 건져낼 수밖에 없는 바로 그것을 만나고 싶다.



눈 온 아침


새 옷 입은 세상이 내게 와서

어느 날 아침 문득,

누구세요?

한다


밤 새 짠 흰 털실 옷 입고

새 기분이 돋았나요?

어여쁘고 멋져요


내 속에도 옴틀 옴틀

새 세상이 움을 트면

모자이크 한 판

퍼즐 한 판

신나게 시작되죠


새 세상이 완성된

어느 날 아침,

아니, 누구세요?

라고 화들짝 놀라 물어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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