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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절의 Mar 28. 2024

내가 만든 샤인머스캣 두 송이

난자 키우기_ 성공?

오늘은 일주일 간의 자가 주사의 결과물을 확인하는 날이다.  야심 차게 숙제를 완료하고 의기양양하게 칭찬을 기다리는 학생의 마음으로 난임클리닉에 당도했다. (실은 며칠 전에 슬쩍 배 초음파로 셀프 미리 보기 했기 때문에 자신만만했다.) 나의 다낭성난소는 포도송이를 넘어 샤인머스캣 마냥 여러 개의 큼지막한 난포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 자식이 없기에 내 배로 만들어낸 것 중에 가히 가장 자랑스러운 성과였다.


그림처럼 난자를 득실득실 키워내는 것이 목적이다. [1]


물론 초음파에서 난포가 많이 보인다고 해서 능사는 아니다. 공갈빵 마냥 속이 빈 것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틀 뒤에 난자 채취를 하기로 정해졌다. 


그리하여, 나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과제가 눈앞에 당도해 버렸다. 바로 갑작스러운 연차 쓰기! 당장 오늘도 이틀 뒤 연차를 통보해야 한다. 한 달 전도, 일주일 전도 아닌데 갑자기 직장에 휴무를 얘기해야 하는 것에 마음이 편치 않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내 앞으로 잡힌 수술이나 내가 꼭 봐야 하는 재진 환자는 없어서 어떻게 병원 업무는 돌아가긴 할 것 같은데, 앞으로가 깜깜하다. 나에게 진료나 수술을 받고 싶어서 예약한 분이 있다면 그분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고, 자신의 몫이 아닌 나의 업무를 가져가게 될 동료에게도 미안하다. 이건 나의 가족계획인거지 그들 입장에선 짜증 날 수 있는 문제이다. 일방적으로 배려를 요구하기에는 마음이 불편하다. 이래서 난임 시술을 받을 때 수많은 여성들이 사직하는구나... 이 길을 먼저 걸었을 난임 선배 분들이 애잔하게 느껴진다. 아.. 임신이란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 투성이인데 임신 전부터 쉽지 않다.


미혼의 시절, 당연히 나 또한 그 '업무를 떠맡는 동료' 역할을 해봤다. 동료의 임신을 축하하고, 의료진으로서 출산을 함께하고, 이후 아기 사진을 보며 귀여워했던 나의 모습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임신 휴가로 인한 인력난에 누적된 피로를 호소하고, 반복되는 당직에 날 선 모습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저출산이 국가적 재난이 된 현재, 어떻게 하면 임신한 동료를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을 만큼의 시스템 개선을 이룰 수 있을까 고민해 보게 된다. 남녀 모두의 출산 휴가 의무화, 인력 충원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있다면 어떨까? 우리 모두가 출산 휴가를 사용한, 그리고 추후 사용할 입장이 되면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지 않을까?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인력 공백이, 누군가의 배려와 희생이 아니라 당연한 삶의 단계로 받아들여지길 바랄 뿐이다. (물론 엄청난 국가 예산이 들어가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기에... 너무 이상적인 바람인가 싶긴 하다. 하.. 정말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공상을 끝마치고, 어쨌든 지금의 내 현실은 받아들인다. 앞으로 갑작스러운 연차를 쓸 것이고, 대신 나머지 근무일에는 동료들의 편의를 위해 최대한 일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날들이 반복된다면 눈물을 머금고 일을 그만두게 될 것 같다. 걱정해서 좋아질 리 없는 미래라면 미리 걱정하지 않기로 하였기에 복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우선 오늘은 열심히 주사를 맞아 원하던 난포 키우기에 성공했으니 마음을 가볍게 가져보려 한다.



그림판으로 슥슥 그려 본 나의 자랑스러운 포도송이들!


참, 일주일간의 실험 결론은 아래와 같다.

1. 주사 방법, 주사 전후 갖가지 술수보다 가장 중요한 건 약물의 종류였다. 아픈 약물은 뭘 해도 아팠고, 안 아픈 건 불편하지 않았다. (아팠던 약물 - Deca, IVF-M/ 아프지 않았던 약물 - Gonal-F, Cetrotide)

2. 그럼에도 가장 도움 되었던 건 아이스팩이다. 얼얼한 통증이 생길 때까지 아이스팩을 대고 있다가 주사하면 바늘 들어가는 통증 정도는 잡을 수 있었다.

3. 진동은 글쎄, 도움 되지 않았다. 살을 꽉 잡고 주사하는 건 안정감이 들어서 좋았다. 

4. 그리고 나는 결국 주사 공포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사를 타인의 손에 넘겼다. 덕분에 남편의 피하 주사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 배에는 주사 바늘이 들어간 자국마다 조그마한 멍이 들어 일주일 만에 열 개 이상의 멍이 들었다. 나의 노력의 훈장같이 자랑스러워서 자꾸만 바바리맨처럼 갑작스럽게 배를 들추며 남편에게 '이거 봐라!' 하고 자랑하게 되는 것이었다. (미안해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꽤 귀여워 계속 놀리게 된다.)



Reference

[1] MD Nguyen Ngoc Chien. "Possible complications after egg retrieval". Vinmec, https://www.vinmec.com/en/news/health-news/obstetrics-gynecology-and-assisted-reproductive-technologies-art/possible-complications-after-egg-retrie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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