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만들어 내는 마법같은 한계?
내가, 누군가가 어떤 정신 세계속에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 바로 ‘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입이다. 입은 독특하게 들어가는 것과 나가는 것이 함께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관리해야 한다. 잘못된 것을 먹으면 몸이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나이를 먹을수록 입에서 나오는 말을 관리해야 한다. 젊었을 때는 그래도 봐줄 여지가 있고, 주위에서 주의하라고 피드백을 준다. 나이를 먹어 개념없이 말을 하면 봐주기 힘들다. 게다가 누가 피드백을 해주지도 않는다. 원래는 나이를 먹을수록 삶의 경험이 쌓이니 지혜롭게 말을 해야 정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반대인 경우도 많다. 큰소리로 말하는 것은 둘째치고, 자기가 무조건 옳다는 전제로 장황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그런 사람중 하나는 아닌지 많이 조심스럽다. (부끄럽지만 20대 후반의 나는 젊은 꼰대였다.)
평소의 생각이 말로 나오는 것이며, 그 말이 다시 사고방식을 결정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잘됐네’이다. 좋은 일이면 좋아서 잘된 것이고 나쁜 일이면 경험을 했기 때문에 잘된 것이다. 원하는 바를 이루면 잘된 일이고, 안되면 더 잘할 기회를 얻는 것이니 잘된 일이다. 하지만 삶에서 언제나 이런 지혜를 사용하지는 못한다. 순간 화가, 짜증이 날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좋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기에 잠시 멈춰서 ‘밝은 면’을 (억지로라도) 찾아본다. 딸이 애용하는 것은 ‘원영적 사고’다. 뭐든 긍정적인 면을 찾으면 적어도 하나씩은 나온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원영적 사고 챗봇도 있다.) 무조건 모든 것을 좋게만 보자는 것은 아니다. 감정에 파묻히지 말고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같이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상황이 좀 더 중립적으로 보이거나, 새로운 기회가 보일수 있기 때문이다.
노가다를 하면서 성실하고 훌륭한 분들도 만났지만 반대로 현실을 불평하면서 자신만의 틀에서 못 벗어나는 분들도 많이 만났다. 일용직 노동자는 말 그대로 일용직이다. 매일매일 어디로 팔려갈지(?) 모르는 입장이다. (좋게 보면 매일이 설레는 일이다. 경기가 좋을때에 한해서..) 그런데 6일 연속으로 같은 현장에 지명되어 간적이 있다. 새로 생긴 고속도로 가드레일을 박는 일이었다. 때는 한여름. 몇 미터 간격으로 가드레일을 놓으며 걷다보면 어느새 장비가 있는 트럭은 저 멀리에 있게 된다. 당시 운전 면허가 있었던 나는 주로 그 트럭을 몰고 와야했다. 다행히 트럭은 에어컨이 있었고 얼음물도 있었다. 잠시 짬을 내어 얼음물을 먹고 에어컨을 쐬며 이동을 한다. 그러기를 몇번. 점심때가 된다. 그러면 나는 운전석에 앉고 다른 분들은 트럭 뒷자리의 땡볕에 앉게 된다. 웃기는 것은 그곳이 개통되지 않은 곳이기에 운전면허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거기서 일하는 분들 다수는 운전에 대해 얘기하면 이런 말을 하곤했다.
“난 원래 그런거 잘 못해”
여기서 포인트는 ‘원래’이다. 못할수도 있지만 원래라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분들은 간단한 것만 배워도 할수 있는 것을 시도조차하지 않았다. 그런 건 ‘원래’ 하는 사람이나 하는거라 생각하니 말이다.
그래서 난 원래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원래’ 수학을 못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잘못된 공부법이 원인이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또한 점수가 나오지 않아 스스로 수포자를 선언했고, 숫자와 담을 쌓으며 살았다. 운동도 마찬가지. 체력이 약했던 나는 원래 운동하고 거리가 먼 사람이라 생각했다. 여전히 구기종목은 잘 못하지만 혼자 하는 운동은 꾸준히 하며 체력을 관리하고 있다. (요즘은 자전거로 여행하는데에 재미를 붙여가고 있다.) 원래라는 말은 스스로에게 한계를 짓고 숨기에 정말 유용한 단어다. 원래 그랬다는데 달리 누가 뭐라 하겠는가? 따져보면 그 원래라는 말은 정말이지 밑도끝도 없는 얘기다. 원래 언제부터? 태어났을 때부터?
이유는 알수 없지만 나는 PC나 기기가 작동하지 않으면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낸다. 심지어 혼자 욕을 할때도 있다. (얼마전에 그 원인중 하나가 '조급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를 내면서도 나는 이런 저런 기기들이 제대로 작동할때까지 다양한 시도를 한다. 그 덕분에 기기를 잘 다루게 된다. 문제는 내가 그 과정에서 ‘거지같다’ 는 말을 습관적으로 쓴다는 것이었다. 하드웨어를 만든 사람, 혹은 소프트웨어를 만든 사람. 일면식도 없는 미지의 누군가를 향해 푸념을 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 사춘기 딸이 이 말을 따라하는 것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이런저런 푸념, 서로에게 비아냥거리며 쏘아붙이는 말들이 기억났다. 정신이 번쩍났다. 크게 반성했다. 지금은 의도적으로 조심하며 그 말을 쓰지 않는다. 딸이 나의 거울이 되어준 준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소중한 아이를 위해서도 다시금 말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신의 입은 어떻습니까? 스스로를 위해 무엇을 입에 넣고 있습니까? 자신과,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 사용하는 말들은 입을 통해 어떻게 나오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