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운동장, 혼자 달리는 날들
Chicago Marathon, 흔히 말하는 세계 3대 마라톤. 조금이라도 뛰어본 자는 가보고 싶은 대회.
세상이 어수선한 시대를 살며, 쉽게 갈수 없는 곳인 시카고, (뭐 보스턴이나 런던 등 다 마찬가지)
버추얼이나 언택트로 많은 것들이 대신할 수 있는 시대가 있어 오히려 이렇게 뛰어볼(?) 수 있게 됐다.
-물론, 시카고를 달린 건 아니지만... 최소한 그 기분을 내며 의미 있는 대회 참가까지 달성했으니.-
기대만큼 나오지 못했던 결과, 그리고 나름 많은 것들을 고민한 준비과정, 그리고 달리며 든 생각들.
그 과정을 시간의 역순으로 정리한다. 언젠가, 시카고에서 또 보스턴에서 직접 뛸 날을 기다리며.
결과. 아쉬움이 남다.
사실 마라톤이라고 해봐야 10k를 몇 번 뛰어본 것이 전부, 그래도 3~4년 이상 뛰며 자신감이 있었다.
아침마다 달리는 날들을 이어오며 나름 지구력에는 자신감도 붙었고, 속도도 나쁘지 않다 여겼더라는.
하지만, 처음 뛰어본 하프마라톤, 21.1km, 13.1마일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거리와 피로 모두,
2시간 내 진입이라는 목표를 두고 나름 출발부터 페이스 조절을 했지만 결과는 2시간 2분대.
마지막에는 뛰는 건지 걷는 건지 스스로 의심스러운 수준의 속도까지 떨어져 기록 단축엔 실패했다.
실망, 그러나 포기는 아니다.
달리며 든 생각, 무념을 넘어 피로감을 보다.
여러 운동 중 유독 달리기를 취미로 둔 건 뛰면서 가지게 되는 무념, 아무 생각이 없어짐의 좋아서다.
뭐, 굳이 생각이 많아지는 것들이 있다면 달리는 나의 상태, 또 오늘 코스에 대한 고민 정도?
잡생각들을 최소화하며 그저 달리는 흐름, 리듬만을 타는 순간이 달리기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런 이유에서 개인적으로는 뛸 때 음악도 잘 듣지 않고 뛴다.-
하지만. 오늘 달리기는 그러지 못했다. 아무 생각이 없기엔 초반, 코스와 속도의 고민이 너무 깊었고...
중반부터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완주 자체를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만큼 힘들다는 느낌이 강했다.
잘 없던 통증도 왔다. 특히, 다리와 발목, (특히 평발이 심한 왼쪽은 발부터 허리까지 다 아팠다.)
내가 과연 지금 무얼 하는 걸까, 라는 자조 어린 후회와 투덜거림이 몰려왔고, 스스로 놀랐다.
고민과 두려움, 아픔과 후회가 만든 결과는 결국 막판, 피로감. 뛰는 것 자체가 즐겁지 않아진 시간...
대략 2km 정도는 그저 노동처럼, 군대 행군처럼, 발을 옮기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대회였다면. 골인 지점의 환희라도 있어 그 피로가 덜했겠지만.
기록이 마음에 들었다면 스스로 뿌듯함에 그 모든 것들이 해소됐겠지만.
그 모든 것들을 넘어선 큰 피로. 무념을 찾지 못한 것이 실패였고, 실패했기에 무념에 이르지 못했다.
준비과정. 그래도 나름 준비를 했다.
대회 한 달 정도 전부터 날짜를 정하고, 스스로 훈련 프로그램을 짜서 나름 목표를 두고 달렸다.
안 먹은 건 아니지만, 술이나 음식도 대략 보름 정도는 꽤 조절했다. 과음, 과식을 피해 몸에 신경 썼다.
추석이라는 걸림돌이 만만치 않았지만 나름 성공적(?)으로 준비를 이어왔다.
큰 대회(?) 참가라는 목표 의식 탓에 달리는 것도, 하루하루 기다리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직접 대회 현장을 갔더라면 더 말할 수 없이 두근거렸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뭔가 들뜨는 마음?
이런저런 준비에서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고, 대회 자체와 기록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회사를 쉬는 안식 기간이라 이런 준비를 더 잘할 수 있었다는 점이 더욱 행운이라고도 여겼다.
소풍 가는 날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크리스마스보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더 즐거운 것처럼...
기다림으로 충분히 즐거웠던 Chicago Marathon, 준비과정의 부족이 기록에서 아쉬움이 됐겠지만,
후회는 없다. 모든 걸 떠올리면 분명 즐거운 달리기가 될 만큼 준비에서 많은 걸 얻었다.
준비부터 출발까지,
출발부터 도착까지.
그리고 지금 이 대회를 정리하는 이 순간까지.
난 뛰는 사람. 빠르진 않다.라는 나의 모토에 어긋남은 크게 없었던 이번 Chicago Marathon,
그 언젠가는 꼭 시카고를 다시 찾아 이 대회에 처음으로 코스를 밟는 경험을 하리라 다짐해본다.
그런 다짐으로 또 긴 시간을 기대와 준비라는 즐거움에 보낼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