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돼지집
약속으로 가득 찬 어느 한 주, 무난하게 약속 잡기 좋은 고깃집들로 평일 예약을 잡았어요. 재밌는 건 다 다른 간판을 가진, 다른 스타일의 고깃집이었다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였던 날에는 대형 화로집을, 소소한 만남에는 정갈한 고깃집을, 소주 한 잔을 기울일 땐 냉동삼겹살을 선택했어요. 요즘은 어떤 곳을 가도 딱히 불만족하지 않을 만큼 고깃집이 상향 평준화가 됐다고 느껴집니다. 아마 사람마다 고깃집 하면 떠오르는 대표 브랜드도 제각기 다를 듯해요.
고깃집의 형태도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변화를 거치고 있습니다. 특히 돼지고기의 가파른 가격 인상이 변화를 부추겼죠. 어릴 때는 삼겹살이 적은 돈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대표 음식이었다면, 요즘엔 돼지가 소값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가격이 올랐어요.
소비자의 입맛도 더 까다롭게 변하고 있어요. 원육의 상태를 판단하고, 고기를 잘 굽는 방법을 연구하고, 찬과의 조화까지 생각하는 게 고기를 먹는 요즘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이런 변화는 프리미엄 고깃집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질 좋은 고기를 선택하고 서비스를 더 함으로써 소비 가격 인상에 적절한 대응을 한 셈이죠. 흔히 서울 3대 고깃집이라고 불리는 '남영돈', '금돼지식당', '몽탄' 같은 매장이 2010년대 후반에 등장하면서 고깃집의 판도가 바뀌게 됩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다양한 선택지와 미식의 기회가 생겼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매장 입장에서는 더 많은 준비와 뾰족한 특징이 필요하게 됐어요.
최근 백종원 대표가 자기 브랜드 중 하나인 '새마을식당'을 컨설팅했던 게 화제였죠. 센 불에 고기를 굽지 않는 점, 7분 김치찌개에 타이머를 사용하지 않는 점 등을 고찰하며 새마을식당만의 고유 감성을 되찾는데 중점을 두었어요. 프리미엄 고깃집이 시장에 자리 잡기 전에는 새마을식당 같은 저렴하고 대중적인 브랜드가 고깃집의 이미지를 대표해 왔습니다. 지금은 식자재 가격 인상과 소비자의 고기에 대한 인식이 상승하면서 시장 포지션이 애매해졌어요. 백종원 대표의 컨설팅도 결국 새마을식당만의 뾰족한 특징을 세우고 시장 입지를 잃지 않기 위한 극약처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변화무쌍한 고깃집의 긴 역사 속에서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는 브랜드는 본인만의 방식으로 살아남은 브랜드예요. 살아남았다는 건 변화에 잘 대처해서 위기를 극복했거나, 브랜드가 가진 강점이 변화에 휘둘리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에 속합니다. 브랜드 수명이 짧은 외식업계에서는 특히 생존의 방법에 대해 깊게 연구할 필요가 있어요. 각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고깃집이 있겠지만, 브랜드의 강점을 가장 잘 살린 고깃집으로 '하남돼지집'을 꼽습니다. 돼지고깃집 역사에서 가장 혁신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그릴링(고기를 구워주는) 시스템을 대중화한 브랜드이기 때문이에요.
전통적인 돼지고깃집의 모습은 드럼통 숯불구이 테이블에 손님들이 둥글게 앉아 주방에서 나온 고기를 직접 구워 먹는 그림이죠. IMF 때 저자본 창업으로 호황을 끌었던 아이템이기도 해요. 당시에는 삼겹살이 저렴했기 때문에 손님이 직접 구워 먹는 그림이 더 어울렸습니다. 격식이 필요하거나 축하를 위한 자리라면 삼겹살보다 돼지갈비를 먹으러 외식을 나갔어요. 돼지갈비는 양념이 되어있고 지방이 적어 잘 굽지 않으면 금방 타기 때문에 그릴링을 해주는 매장도 있었습니다. 요즘은 삼겹살 가격이 돼지갈비보다 저렴하다고 말할 수 없는 시대이니까 삼겹살 문화가 고도화된 게 어쩌면 당연하게도 느껴져요.
2010년에 등장한 하남돼지집은 외진 상권에서 시작했지만 빠르게 입소문을 탔고, 2012년에 법인으로 전환하며 본격적인 프랜차이즈 사업 준비를 시작했어요. 2015년과 2016년에 사업이 본격적으로 확장되며 가맹점 200호점을 돌파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쯤에 회사 생활을 시작했어서 당시 분위기를 기억하고 있는데 회식 장소로 하남돼지집만큼 좋은 곳이 없었어요. 신입사원이라 회식 장소를 매번 잡아야 해서 선택지를 추리다 보면 식사를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이 후보군으로 남았거든요. 하남돼지집은 언제나 안정적인 선택지였던 기억이 납니다. 맛있는 집이냐를 보기 전에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이냐를 고려한다는 것. 우리가 하는 일이 음식을 파는 일처럼 보여도 음식만 파는 건 아니라는 뜻이에요.
홍성태 교수님의 정의를 빌려 브랜드를 '소비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감정적 유대와 신뢰를 포함한 종합적인 경험'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소비자와의 경험은 단순히 음식만 판다고 해서 형성되지는 않아요. 접객 시의 친절도에 따라 손님의 기분이 바뀌기도 하고 매장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맛 평가에 영향을 주기도 하죠. 그런 점에서 하남돼지집은 음식만 파는 게 아니라 서비스를 함께 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기를 구워주는 집이라는 이미지를 오랫동안 가져오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기 때문이에요.
하남돼지집이 서비스를 판다는 얘기를 되짚어 설명을 더하자면, 외식업은 소비자와의 접점이 잦은 업종이기에 판매업이라기보다 서비스업에 가깝습니다. 전체적인 음식의 맛이 평준화된 현재의 시장에서는 더욱 서비스의 중요도가 높아지고 있어요. '외식업은 서비스업'이라는 정의를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소비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종합적인 경험'이라는 브랜드의 정의와 맞물리는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소비자에게 어떤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만들 거냐는 질문이 근본적으로 외식업 시장에서 브랜드로 살아남는 방법이기 때문이에요. 하남돼지집은 매장에 오는 손님들을 위해 고기를 구워주는 방식을 개선하며 소비자와의 경험을 만들었습니다. '고기를 구워주는 집'이라는 이미지를 가질 수 있던 이유이기도 하죠.
그릴링 시스템이 하남돼지집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육류시장의 고급화 키워드는 시장에 강한 경쟁력을 가져왔고 그릴링은 고깃집의 경쟁력을 보여줄 수 있는 전략 중 하나였죠. 지금까지도 하남돼지집과 더불어 고깃집의 대표 프랜차이즈로 언급되는 '맛찬들 왕소금구이'는 그릴링을 그들만의 핵심 기술로 여깁니다. 두 브랜드의 대표적인 특징은 프리미엄 고깃집의 이미지를 선점하며 고기 맛에 많은 투자를 했다는 점이에요. 하남돼지집은 주방에서 숯불에 초벌을 진행하며 빠르게 숯향과 불향을 입힌 고기를 손님에게 내어주고, 맛찬들 왕소금구이는 브랜드 자체적으로 육가공 공장을 운영하며 질 좋은 원육에 3cm 이상으로 커팅한 고기를 선보입니다. 지금은 고깃집이 상향평준화되어 다른 매장에서도 다양한 부위의 좋은 고기를 즐길 수 있지만, 프리미엄 고깃집이 태동하던 당시에는 프랜차이즈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돼지고기였어요.
이렇듯 하남돼지집이 그릴링 시스템을 고유한 기술로 보유한 건 아닙니다. 다만 그릴링을 고깃집의 기본 옵션으로 대중화한 일등공신임에는 분명해요. 여기에는 프랜차이즈의 대중성이라는 이점도 작용했습니다. 직접 구워 먹는 전통적인 고깃집 방식에 익숙했던 손님들에게 새로운 방식의 서비스에 눈을 뜨게 했죠.
프랜차이즈의 이점을 가져가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과 용기도 필요했습니다. 대중적이어야 하고, 수익성을 고려해야 하며, 지점별 차이를 줄이기 위해 어떻게 교육할 건지 고민해야 하는 환경이기 때문이죠. 하남돼지집은 모든 고려 사항의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 많은 손님들을 만족하게 하고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어요. 그런 점에서 고깃집 역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일을 하남돼지집이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혹자는 고깃집의 그릴링 시스템 대중화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며 누군가의 혁신이라 말하기는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어요. 그런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지만, 만약 외식업계의 비즈니스 모델에서 프랜차이즈가 이끈 영향에 대해 누군가 질문을 한다면 여전히 하남돼지집의 케이스를 설명할 것 같습니다.
외식업에서 혁신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또 혁신과 브랜드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해요. 길을 지나다 신규 매장을 만나면 어떤 점이 새로운가를 살펴보기도 합니다.
혁신이 완전히 새로운 것을 의미하진 않아요. 기존에 존재하던 것을 시장에 맞게 조립하여 새로운 문화를 만든다면 그 또한 혁신입니다. 또 새로움과 혁신은 다른 무게를 지녀요. 새롭다는 건 기존에 존재하는 것과 다른 무언가를 선보이기만 하면 되지만, 혁신은 시장의 요구와 맞닿아 새로운 가치를 창출합니다.
예시를 하나 떠올려보면 코로나 전후로 상당한 성장을 이룬 숯불닭갈비 전문 프랜차이즈 '팔각도'가 있어요. 팔각도는 닭갈비를 숯불에 구우면 잘 탄다는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팔각으로 된 판을 직접 개발합니다. 이 불판이 팔각도의 상징이 되면서 소비자의 인식에 새로운 경험을 심어줬죠.
팔각도의 불판은 그릴링 시스템의 대중화만큼 시장에 영향을 준 혁신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브랜드의 성장과 생존에 있어 혁신이라는 키워드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살펴볼 수 있죠. 혁신적인 브랜드일수록 소비자의 인식에 강하게 남는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어요.
하남돼지집이 한창 성장하던 2010년대만큼 지금도 국내에서 경쟁력이 있는 브랜드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서두에도 말했듯 고기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이 상향평준화 되면서 각양각색의 고깃집이 존재하게 됐어요. 소비자의 선택지는 늘어났고, 소비자의 눈높이를 충족하는 고깃집이 많아졌습니다. 하남돼지집이 돼지고기시장에서 차지하던 포지션에서 프리미엄이라는 키워드를 잃기도 했어요. 하남돼지집에 대해 불만을 갖는 소비자가 있다면, 브랜드 자체의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변화하는 시장의 영향이 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하남돼지집은 오랫동안 살아남는 브랜드 중 하나라는 점이에요. 많은 브랜드가 어려움을 겪었던 코로나 시기 전후에도 배달을 접목하는 등 유연한 대처를 통해 안정적인 매출 성장을 이루어냈고 가맹점수는 300호점을 돌파했습니다. 최근에는 해외 시장에 진출하며 큰 성과를 이루어내기도 했어요. 하남돼지집이 가지고 있는 브랜드 강점이 급변하는 시장 상황에서도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하고 있죠.
그들만의 장점이 더 이상 독보적이지 않더라도 어쩌면 소비자들은 하남돼지집의 사정을 이해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또는 그럼에도 여전히 하남돼지집을 필요로 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혁신을 이루어냈던 브랜드의 특권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살아남는 브랜드라는 건 결국 소비자의 인식 속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뜻이니까요. 하남돼지집의 꾸준한 성장은 서비스를 통한 혁신의 강한 인상과 소비자의 인식에서 지워지지 않으려는 그들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