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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교사의 초등학생 살해

2025년 2월 12일

by Andy Feb 13. 2025
브런치 글 이미지 1

초등교사는 40대 여성이었다 한다.

그녀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우울증에 휴직을 했으나 의료진의 진단에 의해 휴직 20일 만에 복직이 됐다 한다.

복직을 했지만 학교의 제제로 수업에 들어가지 못했고 수업을 못하는 상태로 출근해있는 것이 짜증이나 누군가를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 했다고 한다.


대상은 초등학교 1학년 여학생이다.

방과 후 돌봄 학습에 참여했고 그 시간까지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은 그 여학생 혼자였다고 한다.

누구든 마지막에 나가는 아이를 데려다 죽이려 했는데 아무도 없이 혼자 하교하는 데려가기 수월했을 것이라 한다.


범행을 위해 칼을 미리 준비했다고 한다.

그 칼로 아이를 수십 차례…

아이를 찾던 아빠는 그 상황을 응급상황에 부모와 연락이 되는 아이의 폰을 통해 듣고 있었다 한다.


아이는 숨을 거뒀고 그 교사는 스스로를 자해해 피투성이가 된 채 발견됐다고 한다.

그리고 교사는 생명엔 지장이 없다고 한다.


참담하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교사의 피해망상적 일탈일까?

이런 사건일 경우 가해자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심신 미약 상태에서의 우발적 행동으로 처벌이 아닌 치료를 명령할 가능성이 높다.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이 교사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근무가능한 상태라고 진단한 의사의 책임일까?

이런 상태의 교사를 근무하게 한 학교의 책임일까?

적어도 이 교사의 근무를 허용한 것은 의사의 진단에 근거한 적법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의사의 진단에도 위험을 예상해 수업을 제한했고 이 교사의 자리도 교감의 옆자리로 배정해 관찰이 가능하도록 한 점은 나무랄 부분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혼자남아 수업하고 하교하는 1학년 아이를 하교지도나 보호 없이 혼자 하교하게 한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맞벌이를 해 학교 수업이 마쳐도 아이를 돌볼 수 없어 돌봄 교실에 맡겨야 하는 부모의 책임일까?


이 사건을 두고 가해한 여교사의 우울증에 대해 옹호하는 교사들의 주장도 보게 된다.


많은 교사들이 우울증을 겪고 있고 이는 추락한 교권과 무서울 정도로 집요한 일부 학부모의 교사에 대한 폭행 및 하대하는 태도 등의 소위 갑질 때문이라는 것.

때문에 교사로서의 자존감은 사라지고 우울감이 대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우울감이 오늘과 같은 사건까지 초래했다는 것.


과연 그럴까?


그런 주장의 맞고 틀림을 떠나 참담하게 살해된 아이의 주검을 마주하고 있는 부모에게 그 책임이 부모에 있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행태는 또 무엇인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 사건을 쫓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거론했지만 무엇하나 뚜렷하게 이것 때문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정리를 한다면, 아이는 죽임을 당했고 그 직접적인 원인은 교사의 우울증이었으며 교사들의 주장처럼 그 우울증의 원인은 부모의 과도한 교권침해와 갑질 때문이라 정리하면 되는 것일까?


이 사건의 표면적 인과관계는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 정리하고 나면 부모들이 교사를 존중해 주고 갑질을 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있을까를 되물어보면 답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부모들의 주장은 상반된다.

교사의 자질과 소양의 부족을 말한다. 그래서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질만했다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추락한 교권도, 부모의 교권침해와 교사에 대한 무례한 갑질적인 태도가 상호 간에 원인과 결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원인이 그 각각의 문제에 기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다른 원인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뜬금없겠지만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이유지 싶다.

즉 삶이 지향해야 할 올바른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대부분의 가치는 좀 더 많이 버는 것, 좀 더 안정적인 직장에서 좀 더 일할 수 있는 것, 보다 쉽게 보다 많이 버는 것.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이유가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의 미래를 위해 잘 가르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해 선택하는 교사가 몇 명이나 있을까 싶다.

물론 박봉이지만 정년보장되고 퇴직 후엔 노후걱정 안 해도 되는 교사연금이 목적이지 않을까?


이조차도 고등학교 때의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을 고르는 가운데 가장 나은 조건의 직장을 선택할 수 있는 기준으로 선택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처음부터 교사가 목표였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에 맞는 성적을 만들려 노력하는 경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이렇게 교사가 되면 그들의 교육 행위는 제대로 된 교육이 될 수 있을까?

아이들에 대한 애정도 없이, 가르치고자 하는 열정도 없이 그저 돈 버는 수단 정도로 생각하고 딱 그만큼만 수고할 뿐이다.


가르치는 것은 것은 학원에 전가한 채 평가만 하고, 잘 몰라 질문하는 학생에게 학원도 안 다니냐는 핀잔을 주는 경우도 있다 들은 지 오래다.


이런 교사를 교사로 존중할 수 있을까?


교권을 주장하기에 앞서 교사로서의 사명감과 아이들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있는지 묻고 싶다.

사교육에 내몰리고 방치되는 아이들을 위해 학교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얼마 큼의 노력을 했는지 묻고 싶다.


쌍둥이 아들 둘을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시킨 아빠다.

아이들에게 학교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듣다 보면 참 좋은 선생님이구나 싶은 분도 계신다.

아이를 세심하게 배려하고 서툴러도 용기를 주고 자신감을 주어 해 볼 수 있게 이끌어가신다.

아이도 그런 선생님이 좋아 잘 따르고 친구들 보다도 선생님이 좋아 학교 가는 것에 부담이 없고 오히려 즐거워한다.

간혹 아이문제로 통화를 하거나 만나 이야기를 해보면 부모인 나 역시 그렇게 느껴져 한없이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다.


반면 전혀 다른 것을 느끼게 하는 선생님도 계신다.

간혹 아이가 아파 결석을 위해 연락을 하거나 학교 행사로 방문해 대면해 보면 매우 사무적으로 느껴진다.

아이가 집에 오면 선생님 때문에 속상했던 일을 이야기할 때도 있다.


먼저 가르치는 아이에게 지지를 받고, 학부모에게도 지지와 감사를 받는 교사라면 일부 몰지각한 부모들의 잘못된 갑질에 그렇게 까지 상심하고 우울증까지 앓을 정도로 심신에 문제를 느낄까 싶다. 충격은 받겠지만 스스로의 소명과 사명을 붙잡고 다시 심신을 추슬러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상실감과 우울감은 바라고 기대했던 쉽고 편한 일이 아니기에 오는 정신적인 충격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정년이 보장되고 연금이 보장되는 것에 비해 생각지도 못하게 치러야 할 것들이 크고 무거워 느끼는 상실감에 기인하는 것을 아닐까?


학부모도 마찬가지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에 비교해 더 뛰어나갈 바라고, 더 잘되길 바라고, 더 많이 벌고, 더 높아지질 바랄 뿐 이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이에게 무엇이 적합한지는 전혀 고려사항이 아니다.

이렇다 보니 아이가 선택한 직업에 대해 소명이나 사명감 같은 것은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 그 일로 조직에 기여해야 한다거나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생각해 보면 각박한 세상살이에 부모 자신들도 추구하지 못하는 것을 아이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이 어불성설(語不成說)이긴 하다.


그리고 이런 아이에 대한 이기심이 만족할 수 없는 교사의 자질에 필요이상의 과도한 반응으로 증폭되는 것이 갑질이고 교권침해로 나타나는 것일 테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의대에 지원한다.

의사로서 국민들의 건강과 생명에 기여하고 싶은 생각 때문일까?

물론 그런 생각으로 의대를 지원하는 학생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의사라는 직업이 돈 잘 벌고 70세를 넘겨서도 일할 수 있는 미래가 보장되는 직업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대한민국의 가장 우수한 자원들이 그저 일신의 안위만을 위한 선택을 하는 것 말이다.

이런 우수한 인재들이 대한민국의 곳곳에서 사회와 국가와 인류를 위해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바라는 것은 진정 언감생심(焉敢生心)에 어불성설(語不成說)이란 말인가?


쌍둥이 아들 둘을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시킨 아빠다.

이런 일이 우리 아이에게 일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안도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안전을 보장받아야 할 당연한 일이 다행인일, 감사한 일이 되어버렸다.

더불어 앞으로 남은 중학교, 고등학교 6여 년의 시간은 안심할 수 있을까? 그 이후의 각박한 삶은?

내심 걱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대한민국 전체를 부여잡고 있는 잘못된 생각들이 썩고 곪아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것 같아 이런 문제들은 이제 시작이지 싶어 걱정은 더 커진다.


비교하고 경쟁해 내가 더 높아지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로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일까?

내가 하고 싶은 일들로 주위에 기여학고 그것으로 기쁨을 느끼며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추호의 의심도 없이 선생님을 믿어 따라간 곳에서 참혹한 죽임을 당한 그 여린 아이를 생각하고, 그렇게 주검이 된 아이를 마주한 부모의 심정을 생각하다 보니 글이 여기까지 왔다.


누구의 책임인가를 따지기 전에 누구라도 당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그렇게 누구라도 당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이 일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닐까?


그 아이 아빠가 언론에 꼭 언급해 달라 부탁했던 말이 있다.
  '하늘아, 어른들이 미안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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