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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 자리에

여백의 미

by 피터팬


연애할 땐, 말없이도 좋았다.


작은 숨소리 하나만으로도 방 안이 가득 찼다.

아내가 벽에 기대 잠들어 있으면,

그 조용한 숨소리가

내겐 가장 따뜻한 소리처럼 들렸다.


그땐 그랬다.

소리가 없어도 마음은 꽉 찼고,

말이 없어도 온기가 흘렀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채워졌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을 했다.


숨소리는 더 이상 로맨틱한 배경음이 아니었다.

대신 ‘잔소리’라는 이름의 반복적인 소리가

하루 종일, 집안을 메웠다.


“오빠! 방청소는 했어?”

“오빠! 세탁기는 돌렸어?”

“오빠! 화장실 청소는?”

“오빠! 설거지는?”


하루에도 수십 번,

오빠, 오빠, 오빠.


연애할 땐 '오빠'라는 말이 그렇게 듣고 싶었다.

이름 대신 불러주는 그 한마디에

가슴이 뛰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결혼 후엔,

그 “오빠”라는 부름이

설렘보다 긴장이 먼저 앞섰다.


그렇게 시끄럽게,

그러나 따뜻하게,

우리는 서로의 일상을 채워갔다.


그러다 지금은

아내는 서울로,

나는 제주에 남았다.


같은 집에서 매일 부딪히던 우리가

이제는 서로 다른 도시에서

각자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이 집엔 이제

아내의 숨소리도, 잔소리도 없다.


대신 나는 TV를 켠다.

의미 없는 소음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일부러 핸드폰 알람을 자주 맞춘다.

시간을 알려주는 소리라도 있어야

덜 외로울 것 같아서.


빨래가 끝났다는 세탁기 알림,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

에어컨 끄고 켜는 리모컨 버튼음.


그런 소리들이 공간을 채우는 척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히,

이 집에 나 혼자만 있는 건 아니다.

코짱이와 초코,

아내가 이름을 붙인 두 고양이가 함께 있다.


코짱이는 늘 내 옆에 붙어 다닌다.

초코는 아내가 있던 자리에서 낮잠을 잔다.

어쩌면 그 아이들도, 아내를 기다리는 건 아닐까.


이따금 초코가 낮잠을 자던 자리에 조용히 올라와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볼 때면,

나는 말 대신 그 애들을 바라본다.


가끔 초코가 고개를 갸웃하며

조용히 나를 바라볼 때면

나는 말 없이 그 애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작은 숨소리 같은 그들의 가르랑거림 속에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 마음의 빈자리를 덜어낸다.


하지만 이 집을 진짜 채우는 건

아마도 나의 한숨이다.


툭.

허공을 향해 길게 뱉는 숨.

가끔은 숨인지, 울음인지 모를 그 소리.


아내의 숨소리로 따뜻했던 공간,

아내의 잔소리로 시끄럽던 공간은

이제, 나 혼자의 한숨과

고양이들의 조용한 호흡으로

천천히, 조용히 채워지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멀어졌고,

그 사이로 고요만이 남았다.


하지만,

그 잔소리조차 그리운 지금에서야

나는 안다.


그 소란이,

사랑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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