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 없는 순간
새벽 도로 – 은주
도로는 한산했다.
비는 여전히 가늘게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빗물에 번졌다.
도로 위엔 노란 불빛들이 얼룩처럼 흩어져 있었다.
와이퍼가 일정한 리듬으로 움직였다.
사각. 사각. 사각.
은주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전방에 집중했지만,
마음속엔 자꾸 다른 생각들이 고개를 들었다.
‘오늘 아침은 뭘 먹여야 할까.’
‘열이 더 오르면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약값도 벌써 빠듯한데...’
조수석에 놓인 도시락 봉투가 슬며시 미끄러졌다.
그 옆엔 동생의 약봉지가 고개를 떨구듯 기대어 있었다.
은주는 백미러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뒤는 안개에 삼켜졌다.
다시 라디오를 켰다.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
조용하고, 슬펐다.
은주는 핸들을 더 꽉 잡았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온몸이 묘하게 굳어지는 느낌.
숨을 길게 내쉰다.
창문 바깥으론 물웅덩이가 흘러가고,
그 위로 은색 빗방울이 계속 떨어졌다.
뭔가 이상했다.
도시가 너무 조용했다.
새벽인데도, 지나가는 차가 없었다.
그 고요함이,
그녀의 안쪽에서 묘하게 뒤틀렸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교차로가 가까워졌다.
은주는 브레이크를 살짝 밟았다.
차 속도가 느려졌다.
신호등은 깜빡거렸다.
빨간불에서 노란불,
그리고 곧 바뀔 초록.
그 순간,
은주의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었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
어디서부터 시작된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그 감각은 너무나 선명했다.
숨이 멎었다.
한순간,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충돌
왼편에서 갑자기
커다란 헤드라이트가 돌진하듯 나타났다.
은주의 눈이 커졌다.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짧은 경적.
짧고 강렬한,
운명을 찢는 소리.
그리고
쾅!
금속이 찢기는 소리.
유리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
은주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모든 소리가 멈췄다.
태오
정적.
귓가가 멍했다.
머리가 무겁고, 온몸이 둔했다.
심장이 뛰는 건지, 울리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차 안은 파편으로 가득했다.
앞유리는 산산조각 났고,
에어백은 이미 터진 채로 구겨져 있었다.
태오는 고개를 돌리려다 그대로 멈췄다.
목이, 아프다.
눈꺼풀도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숨을 들이쉬었다.
피 냄새가 섞인 공기가 폐로 밀려왔다.
멀리서 경적 소리가 울렸다.
희미한 빗소리.
사이렌 같은 건 없다.
시간은 여전히 멈춘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겨우 돌려
조수석 아래로 떨어진 휴대폰을 봤다.
손을 뻗었다.
덜덜 떨리는 손끝이 폰을 간신히 붙잡았다.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통화 목록을 누르고,
거기 있는 번호 하나를 선택했다.
통화 중...
"...사고 났어."
숨소리가 먼저 흘렀다.
목소리는 갈라졌다.
하지만 담담했다.
"내가 친 거야."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감정을 가질 힘도 없었다.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쪽의 숨소리만 흘렀다.
수신자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태오는 안다.
지금 이 말을 들은 이상,
곧 어떤 일이든 일어날 것이다.
그는 고개를 다시 시트에 기댔다.
눈을 감았다.
비가 여전히 차창을 두드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