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얼굴을 흉내 낼 뿐
매일 아침, 회사 건물 앞에서 몇 초간 멈춘다.
숨을 고르고, 핸드폰을 한번 켜본다.
늘 하던 습관처럼.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전, 유리 벽에 비친 내 얼굴을 본다.
웃고는 있는데, 웃는 게 아니다.
나는 오늘도
‘출근할 준비가 된 사람’의 표정을 흉내 낸다.
실은, 지난달 월차 하루를 냈다고 팀장 눈치를 봐야 했고
그 다음 주에는 회식 불참했다고 뒷말이 돌았다.
일은 늘 야근 각인데, 수당은 없고
팀원이 그만둔 자리에 내 일이 두 배로 늘었다.
그날도 그랬다.
밤 10시쯤, 팀장이 툭 던졌다.
“이 일은 책임감 있는 사람이 해야지.”
그 말 한마디에 뭐가 탁, 꺾였다.
‘책임’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 있는
‘니가 더 해라’, ‘참아라’, ‘네가 져라’는 식의 태도.
그게 회사의 방식이었다.
묵묵히 하면 계속 시키고,
거절하면 ‘유연하지 않다’고 했다.
그날 집에 와서
말없이 샤워기만 틀어놨다.
물소리 뒤에 숨어서
한참을 그냥 서 있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생각도 안 하고,
그냥 그렇게 오래.
감정이 없어진 것도 아닌데
표현이 안 나왔다.
슬픈 것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라,
그냥... ‘이게 뭔가’ 싶은 상태.
다음날 아침,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
출근 준비를 했다.
어쩌면 그게 더 무서운 거다.
이게 익숙해져 버렸다는 것.
내가 점점 무뎌지고 있다는 것.
그 후부터,
퇴사 관련 검색어가 늘었다.
‘퇴사 타이밍’,
‘사직서 양식’,
‘퇴사 후 뭐 먹고 살지’.
창을 닫을 때마다
‘아냐, 아직은 아니야’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하지만 알고 있다.
퇴사를 꿈꾸는 사람은
이미 그 회사에 마음이 없다.
몸은 출근하지만,
마음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사직서는 손보다
마음이 먼저다.
문제는 그 마음을
계속 부정하게 된다는 것.
“조금만 더 버티자.”
“다들 이렇게 살잖아.”
그런 말들로 나를 누르고,
그렇게 하루를 또 보낸다.
나는 오늘도 출근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날 밤 욕실에서
이미 퇴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