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첫 프레임

기억은, 먼저 도착한다

by 피터팬


2017년 6월 20일, 16시 17분 / 강원도 양양, 옛 군사용 초소 아래 폐 전선창고 인근


노인은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나지막한 둔덕을 내려갔다.

무성하게 자란 잡풀 너머, 굳게 닫힌 철문 하나가 숨어 있었다.

기억에만 남아 있던 장소였다.


“여긴... 한 번도 쓰인 적 없는 곳이야.

기록상으론 폐쇄된 지 30년 넘었지.”


그는 조심스레 문틈을 열고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철문이 닫힌 직후, 밖에서는 낮게 깔린 기계음이 들려왔다.


윙... 윙...


드론이다.


늦진 않았다. 하지만 오래 머무를 순 없었다.


같은 시각. SC-0 관제실, 추적 실시간 모니터 앞


“열감지 반응 있습니다.

위치는 양양 L-17, 전방 폐 창고 내부입니다.”


C1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리조 A-02, 진입 시작.”


통제실 벽면이 열리며,

무장한 요원 네 명이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2017년 6월 20일, 16시 34분. 양양 옛 군부대 지하구역, 핀의 위치


핀은 무너진 철제 펜스를 넘었다.

자신이 한때 사라졌던 장소,

그 경계선에 도달했다.


축축한 바닥.

정체된 먼지와 연소가스 냄새로 가득한 공기.

기억이 스며 있던 공간이었다.


그때였다.

무너진 콘크리트 틈 사이에서 무언가 깜빡이며 반응했다.


핀은 몸을 낮췄다.

벽면에 박힌 작은 기계장치. 화이트박스 서브 노드.

그 아래,

이상하게 꺾인 자세로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기계음.

심박 소리.


그리고

“...핀?”


그 목소리.

그날, 마지막으로 자신을 불렀던 사람.


2017년 6월 20일, 16시 38분. 폐 전선창고 근방 숲속


노인은 아이를 철제함 안에 숨긴 뒤,

입구 앞 작은 발자국들을 지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정리조 A-02는 현장에 도착해 있었다.


“지하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


“확인하겠습니다.”


그들이 철문을 열려던 찰나

지하에서 총성이 울렸다.


2017년 6월 20일, 16시 39분. 전선창고 지하


총을 쏜 건 노인이었다.

정리조의 접근을 눈치채고,

지하 벽면에 숨겨뒀던 구형 권총을 꺼낸 것이다.


첫 발은 경고였지만,

다음은 다를 작정이었다.


“놈들은... 설득되지 않아.”


노인은 아이를 철제함 안에 숨기고, 다시 총을 들었다.


“이건, 너를 위한 마지막 선택이야.”


바로 그 순간,

지하 입구가 폭발음과 함께 열리고

정리조 A-02가 연막탄을 투척하며 진입했다.


같은 시각. 지하 깊은 곳, 핀이 있던 시설 내부

“...핀?”


생명유지 장치에 묶인 채,

E는 아직 살아 있었다.

전 화이트팀 요원.

핀은 무릎을 꿇고 다가갔다.


“너... 살아 있었던 거야?”


“정리조가 날 꺼내려다 실패했어...

그 이후로 여기에 묶였지.

기억도, 말도, 꿈도... 다 사라졌어.”


그의 말이 끊겼다.

지상에서 울린 충격이 지하까지 흔들어놨다.


핀은 무전기를 들었다.


“루카, 찾았어. 증언자야.

하지만 오래 못 버틸 것 같아.”


루카의 응답이 이어졌다.


“송신 라인, 4번 창고로 유도했어.

너 있는 구역, 곧 SC-0에 연결된다.”


핀은 눈을 감고, 결심한 듯 말했다.


“그럼... 우리가 먼저 보여주자.

이 사람이 본, 그날의 진실을.”


2017년 6월 20일, 16시 43분. 폐 창고 지하통로


정리조는 정확하게 진입했고,

노인의 매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총알은 떨어졌다.

포위당한 그는,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타겟 확보. 아이 위치는”


철제함 너머, 아이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대원이 손을 뻗으려는 순간,

노인은 힘겹게 말했다.


“그 아이를 건드리면...

너희 위선이 세상에 드러난다.”


방아쇠가 당겨지려는 순간

강한 전파 간섭이 발생했다.


통신 차단.

모니터 마비.

도청·위치 추적, 전부 무력화.


같은 시각. SC-0 관제실

“지금 뭐야?”


B3가 소리쳤다.


“L-17 연결 라인에서 강제 개입 발생!

화이트박스와 동기화 중이던 채널이 꺾였습니다!”


“어디?”


“...서울 외곽, 4번 창고입니다.”


2017년 6월 20일, 16시 47분. 서울 외곽, 4번 창고


수신 장비가 깨어났다.

긴 침묵을 깨고, 한 조각의 기억이 도착하려 했다.


아이의 눈동자에 비쳤던 그날.

방아쇠를 끝내 내리지 못한 손.


루카의 마지막 송신 메시지가 떠올랐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아.

붙잡지 않으면, 사라지는 척할 뿐이야.”


16시 48분. 4번 창고 내부, 수신 라인 활성화


고속 서버에서 푸른 불빛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업로드 시작됨: RJ88A_EX_frame001


수십 개의 CCTV 화면이 깜빡였고,

연결된 외부 라우터 하나가 SNS 서브 도메인으로 장면을 송출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SC-0 내부

“4번 창고 침입 감지!

루트 재설정자 존재! 내부 ID 없음!”


C1은 묻는다.


“선이냐?”


B3가 무전기를 들고 명령했다.


“연결 차단.

모든 대기 노드 리셋.

그리고 물리적 접근 차단.”


“실시간 압수 인원 파견 완료됐습니다.”


C1은 창밖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곳에 남겨둔 데이터는...

전부 파기해라.”


16시 50분. 핀과 요원 E

핀은 송신기에 손을 얹고 말했다.


“이건 내가 본 거야.

그리고, 그가 기억한 거야.”


E는 가쁜 숨을 내쉬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

“그 아이를... 꼭... 지켜줘.

그날의 마지막 생존자야.”


심박 장치가 짧게 울렸다.


삐!

같은 시각. 양양 폐 창고

정리조는 통신이 끊기자 움직임을 멈췄다.

그 틈을 타, 아이가 철제함에서 나왔다.


노인의 총은 여전히 그의 손에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그것을 들지 않았다.

그저 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할아버지...

나... 기억나요.”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대원이 중얼거렸다.


“...이 아이, 뭔가...”


그 순간

외곽에서 강한 발광이 터졌다.


드론 자폭.

제3의 교란자 존재가 확인됐다.


2017년 6월 20일, 16시 54분. 서울 4번 창고 앞


검은 SUV 한 대가 도착했다.

후드를 쓴 인물이 지하 통신 라인에 접속했다.


“송출 프레임 확보.

SC-0는 아직 모르고 있다.

선(線), 연결 유지 중.”


그는 잠시 4번 창고를 올려다봤다.


“이제,

모두가 감춰온 진실의

첫 조각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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