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난 조각, 흔들리는 내부
17시 05분 / 양양 폐 전선창고 지하
습기 찬 지하실엔 한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핀은 등 뒤 벽에 기대 숨을 고르며, 송신기의 온기 대신 사방의 냉기를 느꼈다.
귀에 들리는 것은 금속 스프링 같은 소리,
그리고 위에서 조금씩 내려오는 먼지 낀 공기 흐름.
그가 꺼내 든 소형 무기는 자동이 아닌, 반자동 단발.
여기선 총보다, 움직임을 늦추는 게 더 중요했다.
기억 속에서 그를 삼켰던 공간,
지금은 반대로 누군가를 빼내야만 하는 장소였다.
바로 그때였다.
위쪽 철판에서 낮고 짧은 울림이 두 번, 정확히 간격을 두고 울렸다.
쿵... 쿵...
정리조의 위치 신호.
그들만의 침투 확인 방식이었다.
핀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기억을 떠올렸다.
총 대신 도망쳤던 그날,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이만은 지킨다.”
그는 몸을 낮추며 철제 환풍구 뒤편의 통로로 몸을 밀어 넣었다.
지하의 또 다른 길.
E가 생전에 알려준 유일한 탈출 루트였다.
17시 09분 / 서울 외곽, 4번 창고 – 접근 중
검은 SUV가 또 한 대 진입했다.
내부에는 C1의 직접 명령을 받은 ‘정리조 외부지원 팀’이 타고 있었다.
차량 통신기에서 남성 요원이 말했다.
“E코드 전송 실패. 물리적 확인 필요.”
운전석에 앉은 또 다른 요원이 물었다.
“들킨 건가?”
“아니. 선은 원래 노출을 무릅쓴다.
목표는 은폐가 아니라... 흔들기니까.”
SUV는 천천히 4번 창고 외벽 뒤편, 통신탑 하단 구역으로 접어들었다.
바로 그 순간, 모니터링 서버 하나가 과부하로 꺼졌다.
“뭔가 이상한데... 이건 누군가 내부에 남아 있는 신호다.”
후드를 쓴 인물은 이미 떠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의 흔적은 아직 그곳에 남아 있었다.
17시 13분 / SC-0 내부, C1의 독립 명령실
C1은 홀로 앉아 있었다.
주 통제실엔 이미 긴급 대응 인원이 배치됐지만,
그는 별도로 잠금된 방에서 과거 데이터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건 6월 19일 새벽, RJ-88A 추락 직전의 로그 파일.
조작된 고도 데이터, 삭제된 탑승자 명단,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한 문장.
"4D 포맷 일시차단, 실시간 프레임 손실 감지됨."
C1은 중얼거렸다.
“그 장면이 왜, 지금 보내졌을까.”
그건 단순한 유출이 아니었다.
누군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내부였다.
문득, 테이블 위의 작은 알림음.
B3의 전용 메시지였다.
17:22 / 민간 레이더 부지 / J-S4 진입 시작 예상
C1은 깊은 숨을 내쉬고 메시지를 지웠다.
이번엔 증거가 아니라, 인물 자체를 제거해야 할 시점이었다.
17시 18분 / 양양 폐 창고 지상 – 아이의 움직임
노인의 시신은 아직 그대로였다.
그리고 아이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작은 손으로, 노인의 옷깃을 정리하며 속삭였다.
“할아버지...
그때, 나 안아줬잖아.
진짜 무서웠는데...
그게... 진짜였던 것 같아.”
그 순간, 숲 바깥에서 또다른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정리조 A-02의 잔존 인원.
아이의 눈이 멈췄다.
하지만 이번엔 숨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노인의 곁에서 일어났다.
발소리는 가까워지고 있었고,
뒤를 돌아서면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이는 그대로 정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 안 무서워. 아저씨들, 나 안 데려갈 거지?”
17시 22분 / 민간 레이더 부지 – 진입 시작
루카는 마지막 송신을 마치고, 숨을 죽였다.
그가 지금 있는 곳은, 정부 지도를 벗어난 민간 통신망 근처.
J-S4라 불리는 그 지역은, 전파 감시망의 사각지대였다.
차량에서 내린 그는 방수 가방을 열고 새로운 송신기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다음 건, 실시간이다.
편집도, 해석도 필요 없어.”
그 순간, 통신기 안으로 핀의 응답이 들어왔다.
“J-S4 도착했나? 아이도 곧 이동한다.”
루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거짓말의 끝을 보여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