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채우는 건, 시간보다 의미였다.
퇴사한 지 며칠이 지났다.
처음엔 아침에 눈을 뜨는 게 신기했다.
알람이 없어도 7시 반이면 몸이 먼저 깼다.
습관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젠 그 시간에 눈을 떠도
굳이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누가 기다리는 것도, 회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핸드폰을 들면 카톡방은 조용했고,
회사 메일함엔 광고 메일만 쌓여 있었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식탁에 멍하니 앉았다.
물 끓는 소리만 방 안에 또렷하게 들렸다.
그게 괜히 신경 쓰였다.
평소엔 소음처럼 흘러가던 소리가
이젠 너무 크게 들렸다.
하루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는 기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으면서도
아무 의욕이 나지 않았다.
넷플릭스를 켜서 아무 영화나 틀었다.
보다가 멈추고, 다시 돌리고,
결국엔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다가
시간이 훌쩍 흘렀다.
점심은 대충 라면 하나로 때웠다.
그릇을 싱크대에 올려놓고 나니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게 갑자기 크게 느껴졌다.
‘쉬면 좋겠다’고 그렇게 바라던 게
막상 현실이 되니까 이상하게 불안했다.
저녁 무렵엔 창밖이 붉게 물들었다.
예전 같으면 퇴근 준비하던 시간이었다.
그 시각이 되니까
몸이 자동으로 뭔가를 해야 할 것처럼 긴장했다.
그런데 해야 할 일이 없으니까,
그 긴장이 허공에 흩어졌다.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 한 통 오지 않은 날이
생각보다 버거웠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진짜 자유라면,
내가 원한 건 이런 모습이었을까?’
다음 날 아침,
노트를 꺼내놓고 연필로 몇 줄을 적었다.
‘8시 기상’, ‘커피 한 잔’, ‘30분 산책’, ‘글쓰기’.
딱 그 정도만 썼다.
처음엔 그냥 의미 없는 낙서 같았다.
근데 이상하게,
그걸 적은 날은 조금 덜 무너졌다.
하루가 끝나면,
‘그래도 오늘은 뭔가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나한테 준 약속이니까
깨지지 않게 지켜보고 싶었다.
그날 이후로
일정을 조금씩 채워 넣었다.
청소, 산책, 글쓰기, 요리 연습.
별거 아닌 것들이지만
하루가 다시 형태를 갖기 시작했다.
예전엔 일 때문에 지쳤고,
이젠 일 없어서 무너졌지만,
결국 중요한 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 있느냐’였다.
이제는 알겠다.
텅 빈 일정표를 채우는 일,
그게 나를 다시 살아 있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