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마치며

보살핌의 자리

by 약속의 땅


통학지도원의 일을 시작한 지 어느새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모든 일이 손에 익었다. 사실 까다롭거나 어려운 업무는 없다. 아이들을 태우고, 안전을 살피고, 내려주는 단순한 반복의 일과일 뿐이다. 그러나 늘 변수는 있다. 아이들이 흘리거나 뱉은 침을 닦아야 하고, 안전벨트를 거부하는 아이와 기싸움을 벌이기도 하며, 울음과 웃음이 끊이지 않는 차 안의 소동에 익숙해져야 한다. 반복되는 돌발이 결국은 평범한 하루의 일부가 된다. 사람은 결국 적응의 동물, 반복의 동물임을 새삼 확인한다.


하루 다섯 시간. 짧은 시간과 낮은 보수 탓에 다른 일을 겸해야 생활이 된다. 그럼에도 나는 이 일 덕분에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으니 나름 괜찮다고 여긴다. 무엇보다 이 일을 하며 얻은 가장 큰 만족은 ‘사람’을 다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보살핌을 받는 존재에서 보살펴야 하는 존재로 옮겨 간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던 자녀가 어느 날 부모를 돌보게 되는 것처럼. 보살핌은 인간됨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을 살아낼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일 뿐이다.


나는 매일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들을 보살핀다. 그 속에서 나는 따뜻함을 느끼고, 보살핌의 가치를 다시 경험한다. 아이들이 내 손길을 알아차릴까 싶지만, 적어도 그들이 좋은 기억을 가지길 바란다. 그런 마음으로 일하다 보니, 울음과 웃음, 반복되는 행동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습관과 버릇이 있지 않은가. 다리를 떨고, 헛기침을 하고, 손가락 관절을 꺾는 것처럼. 그렇다면 아이들이 보이는 행동도 결국은 ‘살아 있음’의 표현일 뿐이다.


침을 뱉으면 기분이 나쁘구나, 스스로 머리를 치면 화가 났구나, 웃음이 많아지면 오늘은 좋은 날이구나. 그렇게 단순하게 바라보니 오히려 아이들이 이해된다. 안전벨트를 채우고 풀기를 반복하는 모습은, 방을 치우라 해도 듣지 않는 내 아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익숙해진 만큼 가까워진다.


계절은 어느새 여름을 지나 가을 초입에 들어섰다. 아이들은 여전히 울고 웃으며, 버스를 자기들만의 소리와 몸짓으로 채운다. 차 안에서 내 옷깃을 잡으며 “선생님 앉아”라고 말하는 신형이를 보며, 우리는 함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누군가를 보살핀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했을 때 느끼는 기쁨과는 다른 종류의 행복이다. 내적으로 채워지는 충만감이 있다. 아이들의 부모, 특수교사, 실무원, 활동보조인, 운전원, 조리원까지… 수많은 손길들이 아이들을 돌본다. 이 복지가 가능하다는 사실도 감사하다. 아무리 각박한 시대라 해도, 보살핌의 본성을 잃지 않는 한 인간의 삶은 여전히 ‘살 만한’ 것이다.


물론 보살핌 대신 탐욕으로 타인을 해치는 이들도 있다. 권력과 법마저 사사로이 사용하는 이들, 그 더러움의 부스러기를 먹으려는 자들이 우글대지만…그러나 여전히, 가장 연약한 존재에게 따뜻한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아이들에게서 보살핌을 받는다. 내 옆자리를 앉아 내 벨트를 채워주려 하고, “선생님 좋아요”라고 속삭여 주는 순간, 나는 그 작은 손길들에서 가장 큰 위로를 얻는다.


이 사회가 아이들의 마음만큼만 유지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서로의 안전을 살피고, 함께 있어서 좋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회. 이미 우리 버스 안의 아이들은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누군가 울면 곁에 다가와 알 수 없는 말로 위로하고, 내게 와서 상황을 알린다. 나는 그들에게서 잃어버린 가장 기본적인 마음을 다시 배운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늘도 나는 아이들과 함께 가을의 길 위를 달리고, 머지않아 올 겨울을 함께 맞이할 것이다. 이 시간이 내게 준 건 단순한 업무가 아니라, 잊고 있던 인간됨의 회복이었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이 삶의 자리에서 누군가를 보살피는 기쁨을 함께 누려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 통. 지를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