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두 번 읽은 소설.
와우와우와우. 이 책은 나에게 세 개의 와우 포인트를 주었다.
책을 읽으면서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 책이 드라마로 만들어졌나? 내가 그 드라마를 봤나? 지나가다 어디서 오디오북으로 들었나? 분명히 본 것 같은데... 나는 발췌독은 안 하는데 누가 나한테 이 책 얘기를 해줬나? 이와 같은 생각의 시작은 아래 부분을 읽을 때부터였다.
일이 성사됐다고 하면 될 걸 꼭 '석세스 났어'라고 하고, 일이 들어왔다고 하면 될 걸 꼭 '오더 들어왔어'라고 했다. 어플라이하시려면 잡 애플리케이션을 잘 읽어보세요, 그 회사 하고는 케미컬이 잘 안 맞으실 것 같아요, 파일을 킵하고 있다가 나한테 센딩해줘,
내가 예전에 분명히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했다. "여보, 이메일 킵하고 있다고 나한테 샌딩해줘. 흐흐흐흐. 웃기지?" 태환이 번역한 책에 그가 머리를 기르고 명상포즈를 취한 사진이 있었다는 부분, 흐물이가 대학로에서 미연을 기다리겠다고 한 부분에서는 아무래도 읽어놓고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아 독후감을 써놨던 비공개 블로그를 찾아보았다. 이럴 수가! 읽었던 책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었던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 채 재밌다, 재밌다 하면서 읽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왜 이제까지 이 책을 안 읽었지? <잠실동 사람들>도 재밌게 읽었는데, 이랬단 말이다.
이 전에 <잠실동 사람들>을 재밌게 읽었었다. 그 후, 당시 즐겨 듣던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에서 장강명 작가가 소개해줘서 <모던 하트>를 읽었던 모양이다. 이것이 첫 번째 와우포인트.
두 번째 와우포인트는 두 번 읽었는데 아예 처음 읽는 책인 것처럼 책 내용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에 더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재밌어서 계속 책 읽을 틈만 찾았다는 것이다. 나는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교실에 아이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약 20분간 매일 책을 읽는다. <모던 하트> 빨리 읽고 싶어서 평소에 타던 버스를 타지 않고 그 보다 먼저 오는 버스를 탔다. 우리 반 아이들이 도서관 가는 것을 좋아하니, 옳지! 애들 도서관에서 책 읽을 때 나도 같이 읽어야지, 하면서 도서관 가는 시간에 별표☆를 해놨다. 교과서 진도도 나가야 하고 다른 활동이 많아서 도서관은 보통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만 간다.
아니, 사람 마음을 이렇게 그대로 문자로 옮길 수 있구나! 저번 임경선작가 에세이도 그렇다고 했었는데, 역시 작가님들은 대단하다! 하면서 여러 군데 형광펜을 그었다(아무도 알지 못하는 <엄마는 개인주의자>라는 책을 낸 본인도 작가이긴 작가인데... 흠흠). 헤드헌터인 30대 중후반의 여자를 둘러싼 가족, 부동산, 학벌, 연애, 관계, 사람들의 이기적인 본성 등을 아주아주 재밌고 솔직하게 보여준다. 그럼 그렇지, 내가 이렇게 재밌는 책을 안 읽었을 리가 없다.
세 번째 와우포인트는 당시에 썼던 리뷰에서 필사한 문장과 6년 후인 현재 밑줄 그은 부분, 격하게 공감하며 읽었던 부분이 상당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생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다. 어쩌면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사는 세상 또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지난 6년간 우리는 코로나와 급격한 자산 상승기, AI의 본격적 출현을 겪으며 급변의 파도를 탔다. 거의 쓰나미 수준이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도 존재한다. 많이 달라졌지만 굳건히 남아 있는 편견과 인식체계가 있다. 인간이란 태생적으로 끝없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이기적이므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아래는 6년 전에도 현재에도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 맞아를 여러 번 외치면 읽었던 부분이다.
자식 둘을 낳아 애지중지 길러 대학까지 보냈건만 자식들의 성별이 딸이라는 이유로 명절 때는 갑자기 자식이 없는 사람처럼 되는 것이다. 남자의 집안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가족들의 모습을 비춰주는 텔레비전 뉴스나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합심하면 명절을 현명하게 날 수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명절 특집 신문 기사를 보면서 의문이 든 것도 세연이 결혼한 이후부터였다. 이 나라에는 우리 집처럼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존재가 아예 없는 집, 그러니까 딸만 있는 집도 적잖이 있을 텐데 왜 텔레비전이나 신문은 그런 집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는 것일까? 우리 집처럼 아들이 없는 집은 '비정상적인' 집일까?
(2024년 현재, 아직도 신문에는 명절마다 기차역에서 4인 가족이 웃으면서 고향으로 향하는 사진, 시부모님으로 추정되는 분들이 반갑게 맞이하는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나온다. 되게 웃기고 안쓰럽다고 생각한다.)
마흔. 그때 나는 어떤 일상을 영위하고 있을까. 서치펌 이을 계속하고 있을까. 여전히 싱글일까.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작정 나이 먹기가 두려운 것. 그래서 인류가 수천 년 동안 행해온 공고한 관습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이는 것. 차라리 차악을 택해 무시무시한 세월을 덮고 건너가는 것.
서울대 출신 의사와 Y대 출신 연구원 태환. 갑자기 그들이 나와는 태생부터 다른 고귀한 귀족처럼 느껴졌다. 나는 감히 올려다볼 수도 없는 존귀한 계급에 속한. 이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설령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스스로 그렇게 느낀다면 나는 이미 비천한 존재이다. 나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학 좀 안 좋은 데 나왔다고 비천하다니 그건 오버야. 수없이 되뇌었지만 자꾸만 따라붙는 자괴감은 좀처럼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딸이 모시건 아들이 모시건 나이 들어 자식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같이 살지 않고 요양원에 간다 하더라도 가끔씩 보러 오고 신경 써줄 자식이 있으니 그것 또한 다행스러운 일 아닌가. 세연도 지금은 애 둘 키우며 회사 다니느라 눈코 뜰 새가 없지만,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크고 나면 여유 있게 삶을 관조하며 아이들로 인해 파생된 인연들을 소중하게 돌아볼 것이다.
(크게 공감되지는 않지만 이렇게 되기를 희망하며 적어보았다_2018년 당시에 썼던 말)
원인과 과정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인연이 이미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다음.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받아들이고 다시 걸어가는 것.
아, 한 가지 '이건 아닐 건데'했던 장면이 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모임에 나온 부부의 모습이다. 음식점에서 와이프에게 '야, 너'하면서 애 똑바로 보라고, 애 엄마가 뭐 하냐고 하면서 냉면 국물을 들이켜는 애아빠의 모습이다. 나는 실제로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정말 그런가 싶다. 내가 본 어린아이가 있는 집은 최소한 밖에서는 (집안 사정은 내가 모르니) 엄마는 친구들과 열심히 수다를 떨고, 아빠는 아이와 함께 놀거나 아이가 넘어지면 아빠가 먼저 달려간다. 이 책이 출판된 해가 2013년이고 내가 책을 읽은 것은 2018년이니 그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설 속 장면은 내가 보지 못했을 뿐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내 경험 및 생활 영역 안에서 2018년과 2024년의 아이가 있는 가정의 음식점 외출 모습이 소설 속 장면처럼 어이없지는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현실적이면서 재밌는 소설을 읽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하다. 내 뇌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가 조금 걱정이 된다. 정아은 작가에 대한 나의 관심 레이더가 다시 한번 활짝 펼쳐졌으니 다음 책은 뭘 읽을까? 밀리의 서재를 검색해 본다. 음...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을 읽고 싶은데 밀리의 서재에 없군. 그럼 그 남자, 그 여자 시리즈를 읽어봐야겠다. 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