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위로, 응원, 길고 긴 서사 없는 재밌는 이야기 책
일등은 당신처럼 공부하지 않았다, 나는 주식대신 달러를 산다, 느리게 나이 드는 습관, 타이탄의 도구들, 스타벅스 일기 등 쟁쟁한 책들을 물리치고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은 책.
5개의 책을 동시에 읽고 있었다.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상황에 따라서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읽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학교 도서관에 신청한 임경선 작가의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가 도착했다. 기다리던 책이어서 얼른 가져왔다. 밀리의 서재에서 읽고 싶었는데 거기에는 이 책이 없었다. 탭을 통해 책을 보면 잠도 덜 오고 밑줄 긋기도 쉽고 저장도 쉬워서 요즘은 거의 전자책을 읽는다. 밀리의 서재에 읽고 싶은 책이 없으면 무척 아쉽다.
받아온 책의 겉모습은 작고 심플했다. 멋 부리지 않았는데 멋있다. 꾸민 듯 안 꾸민듯한 바로 그 느낌이다. 임경선작가가 좋아한다는 짙은 초록색이 표지 색깔이다. 표지 가운데에는 작가가 허리를 숙여 운동화를 신는 모습의 사진이 있다. 이런 자연스러운 사진을 책 표지에 실을 수 있는 작가라니. 부럽다. 나는 잠시 또 질투를 느꼈다. 하지만 임경선 작가는 내가 오래 질투하기에는 너무 대단한 분이 아닌가.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읽는 동안 위에 써놓은 다섯 권의 책들은 밀쳐두었다. 하루 이틀 만에 다 읽었지만 한 번 시작하니 다른 책으로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소설도 아닌데 다음에 무슨 말을 썼는지가 왜 궁금하지? 왜 이렇게 재밌지? 왜 자꾸 계속 읽고 싶지? 이것이 임경선 작가 에세이의 힘인 것 같다. 유머가 있는 것도 아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재밌다. 아마도 작가의 솔직함과 눈치 보지 않음 때문일 것이다.
임경선 작가의 소설을 두 권인가 읽어보았는데 솔직히 소설은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임경선 작가 스스로도 밝혔지만 그는 사랑과 감정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 하고 그런 소설을 쓴다. 하지만 나는 반전 있고 스릴 넘치는, 정유정이나 히가시노 게이고 스타일의 소설을 좋아한다. 드라마도 연애하는 건 잘 안 본다. 특히 어린 사람들 연애하는 것은. 상대방의 감정에 관심을 두고 들여다보고 싶기는 하다. 하지만 거기에 남녀 간의 사랑이 들어가면 시들해진다. 남녀 간 사랑에 대한 드라마나 책 속의 등장인물, 그것을 만든 사람, 보는 사람 모두 철이 덜 든 것처럼 보인다. 한가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동성 간의 사랑이나 중년의 관계는 재밌게 보는 편이다. 동성 간의 사랑은 호기심 때문에, 중년의 사랑은 아마도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그럴 것이다.
아, 그러니까 나는 임경선 작가의 에세이를 무척 좋아한다. 이 분의 에세이 초기작 빼고는 거의 다 읽었다. 롤모델로 삼고 싶은 여러 인물들 중에 하나이다. 자기 취향이 확실하고 너무 친절하지도 않고 뻔한 위로나 공감을 하지 않아서 좋다.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글에서 임경선 작가는 확실히 그렇다. 본인도 그렇게 말한다. 본인은 취향이 확실한 편이며 하나마나한 말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다들 그렇겠지만 나도 애 키우기 힘들 때,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관계 속에서 힘들 때, 주변에 하소연하거나 조언 같은 것을 구한다. 어차피 들을 소리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안 하고 싶지만 막상 또 사람을 만나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열변을 토하게 된다. 다들 뻔한 말을 한다. 괜히 말했다, 싶은 경우도 꽤 있다. 조언이랍시고 자기 얘기만 일방적으로 길게 늘어놓거나 해결도 못해줄 '공감과 위로'를 해준다. 원치 않는 조언 같은 말을 들을 때는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속으로 다짐한다. 충고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데 굳이 충고를 해줄 때는 '역시 내 입이 문제다'하고 말 꺼낸 것을 후회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어설픈 공감과 위로를 경계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공감과 위로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주로 해결책을 모르는 사람들이 쓰는 방법 같다. 깊은 공감과 진정한 위로가 아니라면 웬만한 공감과 위로는 효과가 없다. '있어 보이는' 말을 하면서 '나는 공감과 위로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 것 같기도 같다. 무슨 말을 해주자니 책임지기는 싫고, 책임까지는 아니어도 부담스럽고, 동시에 좋은 사람 이미지로 남고 싶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작가의 말대로 '건조한 팩트'를 얘기하며 해결책을 내놔주는 선배가 있었으면 했다. 이 책에는 임경선의 작가의 그런 면이 두드러지게 보여서 더욱 좋았다.
137쪽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예전에 한 강연에서 김영하 작가님한테 여쭈었다. '단편소설집만 내봤는데 장편소설에 도전하고 싶다. 그런데 지금 어린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힘에 부친다. 집중력을 깊이 오래 유지해야 하는 장편소설을 대체 어떻게 쓸 수 있을까'라고. 반쯤은 하소연이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양귀자 작가님이 예전에 똑같이 가정을 돌보느라 바빴는데, 매일 점심시간 30분만 소설 쓰기에 할애하기로 결심했고, 그것이 누적되어 소설 <모순>이 나왔습니다."
당시 김영하 작가님이 적당히 듣기 좋은 응원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건조하고 냉철하게 팩트를 짚어준 것은 나를 진정으로 위하는 배려였다.
책은 세 파트로 나뉜다. 나이, 작가로서의 생존, 삶의 선택. 나이 든, 작가로서든, 크고 작은 삶 속의 선택이든 결국엔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고 떳떳한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동안 나는 남들이 원하는 것을 남들이 정해준 시기에 하며 살았고 그것에 대해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것이 잘못되었거나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소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 전력으로 달려보았는지는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 적이 없다면 한 번쯤 해보는 것이 좋겠다. 전력으로 달리는 것은 매번은 못할 테니 일상에서 조금씩 나눠 꾸준히 하면 된다.
각 파트마다 묻고 답하기가 있다. 그중 후회와 자책에 대한 물음과 답이 있다. 답변은 사실 흔하게 할 수 있는 말이다. 동시에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임경선 작가의 글에서 보니 더 정답처럼 느껴진다. 후회와 자책을 자주 하는 나는 임경선 작가의 move on 모드를 익혀보려고 한다. 191쪽에서 저자는 건조하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과거의 선택은 되돌릴 수가 없으니 후회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후회는 자책과 한 세트라서, 그냥 후회 자체를 하지 않는 게 좋다. 후회하기 시작하면 계속 과거를 곱씹어보는 과정에서 과거를 왜곡시킬 수도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는 어떤 형식으로든 교정된 과거고, 혹은 내 편의대로 해석한 것도 있다. 과거를 돌이켜보는 일은 끝내고 현재 내 눈앞에 보이는 문제들에만 집중했으면 좋겠다.
도움 안 되는 공감과 위로에 지친 사람, 조언을 가장한 길고 긴 인생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분명히 나처럼 재미있게 이 책을 읽을 것이다. 얻어가는 것도 분명히 있다. 에필로그 없는 책의 엔딩도 멋있다.
우리 인생에 완결된 성취 같은 것은 없다. 그저 계속 가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참 많은 것을 성취한 사람이라고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정작 그 사람은 또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도 모든 선택의 순간에 고뇌가 있고 그 결과를 짊어지면서 또 앞으로 걸어 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