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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연 Sep 12. 2022

우아함의 역설

고슴도치의 우아함 - 뮈리엘 바르베리



  MZ세대(1980년대~2000년대 초 출생)의 끝자락에 포함되는 나는 요즘 매우 흥미를 느끼는 게 있다.


  성격유형검사(MBTI)다. 혹자는 16가지 성격유형으로 어떻게 다채로운 인간군상을 나누냐고 반발하지만 나는 거의 맹신할 정도다. 이 테스트를 몇 번씩이나 해봐도 나는 할 때마다 용의주도한 전략가형(INTJ)이 나오는데, 여자로서는 극히 드문 형태라고 한다. 어렸을 때 내 성격이 좀 이상하고 남들과는 다르다고 자책한 적이 있다. 그 때도 이 MBTI를 알았더라면 이런 나의 성향이 그저 하나의 유형일 뿐이라 생각했으면 마음 편했을 까 싶었다.


  이 책은 나와 아주 비슷한 성향을 가진 논리술사형(INTP) 성격의 소유자인 한 후배가 추천해줘서 읽기 시작했다.(정작 그 후배는 3개월이 넘은 지금도 완독하지 못했다) 나의 책 취향은 매우 독특하고도 고유해서, 대개는 남이 추천한 것을 거의 읽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추천을 받은 이후 내 머릿 속 어딘가에 저장돼 있었는데 어느 날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됐고 그 때 바로 빌려 읽기 시작했다.


  가슴 아픈 사실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의 결말이 매우 당황스러우면서도 슬프다는 사실이다.

슬프다는 대목에서 누군가는 이미 예상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 주인공이 죽는다. 나는 그 부분에서 내 눈을 의심했다. 저자는 굳이 주인공을 이렇게 허망하게 보냈어야만 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피엔딩만이 훌륭한 소설은 아니지만 그래도 소위 주인공의 의식에 공감하며 그녀를 믿고 듣고 결말까지 따라왔는데 이렇게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다는게 너무나도 허무했다. 그런데 저자는 결국 그게 인생이란 걸 말하고 싶었던걸까. 아등바등하며 살아도, 책 속 주인공처럼 초연하게 살아도, 한 번 왔다가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이라고.


  주인공에 몰입했던 이유는 그녀도 어쩌면 오늘날 (10여 분을 들여)MBTI검사를 해본다면 나 또는 내 후배가 가진 성향이 나오리라 상상했다. 그만큼 나와 비슷했다. 남의 일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남들도 나의 인생에 대해 쓸데없이 참견한다거나 왈가왈부 하지 않길 바라며, 그저 책을 사랑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 스스로를 위한 최소한의 우아함을 잃고 싶지 않아하는 것.

주인공 '르네'는 본인을 두고 이렇게 표현한다.


'나 같은 수위 아줌마, 비좁은 수위실 속에서 비록 가시적 권력을 포기했지만 그렇다고해서 정신적 권력을 포기하지는 않는 나.'


  직업에 귀천은 없다지만 인간은 종종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하는 일을 가지고 평가하고 만다.

나도 한 번은 그런 비슷한 사례를 겪었다. 일종의 확증편향에 갇힌 것이었는데,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더니 여성이 받아 대화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사장님 좀 바꿔주세요."라고했다. 그랬더니 그 여성은 "제가 사장입니다."라고 했다. 앞선 대화에서 충분히 그녀가 사장임을 인지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 사고는 이미 그녀가 사장이 아니라고 멋대로 생각해버린 것이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사례로 남아있는지.


  르네는 '남들이' 그렇게 멋대로 규정해버린 그저 그런 수위 아줌마일지 몰라도 결코 본인은 본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오히려 특유의 우아함으로 스스로를 견고하게 쌓아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쌓다'라는 단어의 어감이 이렇게나 우아하고 고상한 단어인지를 새삼 인지했다.


'이런식으로 그는 매일 자기를 쌓는다. 나는 자기를 쌓는다고 했는데 그건 매일 밤마다 모든 것이 재로 변하고 그래서 제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듯 이 일을 매번 새로운 건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의 제 삶을 산다.'


  그러면서 동시에 '성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재건해야한다'는 의무감을 설명하면서도 이 정체성은 '절망을 가리고 거울 앞에선 자기에게 자기가 믿고 싶은 거짓말을 하는' 그런 '아주 덧 없고 엉성한 덩어리'라고 표현한다.


  

  얼마전 온라인 상에 떠도는 그림을 우연히 봤는데 거기에 이렇게 써 있었다.

'울고 싶을 때 실컷 울라'며, '어른이 되면 속으로 울어야 한다'고.

난 이 짤을 보면서 인간이 남 앞에서 울지 않는 점은 창피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울지 않아도 될 만큼 뭔가를 포기한다거나 타협함으로써 적당한 가면을 골라 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도 역시 책 <신과 나눈 이야기>에 나오듯, 내가 상심을 하든 기뻐하든 즐거워하든 노여워하든 어찌됐든 인생은 무던히 흘러간다는 점을 독자에게 인식시킨다.


  '사람들은 인생을 걱정과 희망이 뒤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생의 나약함을 의식하고 불쑥 닥칠 사고들을 걱정한다'면서도, '동시에 해야만 했던 것을 다는 것, 양육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 것에 대한 만족을 느낀다'고 표현한 점이 그렇다. 그리고 뒤이어 아주 신박한 비유를 덧붙였는데 바로 이 문장이다.


'엄마는 그렇게 삶을 본다. 분무기로 한 번 분사하는 것만큼. 비효과적이고 안전이라는 짧은 환상을 주는 주술적인 행위들의 연속으로.'



  직장을 다니면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상사들의 악취미다.

그들은 정말 하나같이 사무실에서 식물을 키운다. 사람의 취미나 취향은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내가 굳이 '악'취미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렇다. 그들 중 누구도 후배의 이야기에 한 번 더 귀 기울인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아무리 온화했던 사람이라도 권력을 손에 쥐어줬더니 바뀌었더라하는 사례에 해당하는 사람이 대부분일지언정 말이다. 강약약강의 표본이자 간신 만을 옆에 두고 그들로부터 새어나오는 의도성 아부와 아첨사이에서 행복해하는 그들은 정말 하나같이 손에 분무기를 쥐고 쉴 새 없이 뿌려댔다. 그 모습이 내 눈에는 모순으로 보였다. 평소에는 밥 먹으러 밖으로 나가는 것 조차 귀찮아하는 그들은 비가 오면 자연수를 줘야 한다며 화분을 하나씩 회사 입구에 꺼내놓지를 않나 본인의 부재 속에 행여 말라 버릴까 간신들에게 본인 대신 물을 주라고 정성스럽게 읊조리기 까지 한다.

  

  이런 행위가 나는 도대체 뭐로부터 촉발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나니 알 것도 같았다.

바로 안도감이자 스스로 만들어낸 만족감 같은 것이었다. 르네의 표현을 좀 더 차용하자면 '주술적인 행위'인 것이다. 본인이 갖고 있는 권력과 명예를 스스로 인정하기라도 하듯이.


  주인공 르네는 남편과는 사별했고 슬하에 자식은 없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그녀는 '쉬운 길에 결코 발도 들인 적이 없는' 인생이라, TV도 안보고 신문도 믿지 않으며 삶이 인간에게 더 수월하게 다져놓은 모든 오솔길을 걸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오직 책을 통해 하나씩 하나씩 진리와 순리를 섭렵해가며 세상의 구성원으로서 아무도 모르게 살포시 속해 있다가 조용히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더 슬프다.


  그녀에 따르면 '자식은 자기자신과 대면해야 하는 그 고통스러운 작업을 미루도록 도와주며 그 다음에는 손자손녀들이 그 역할을 이어받는다'고 했다.

다시 말해 자식을 키운다는 건, 어쩌면 인생에 있어서 자칫 지루하거나 고통스러울 수 있는 나만을 바라보는 일을 환기시켜준다는 의미가 아닐까.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을 생명을 두고 한 표현치고는 지나치게 가볍지만 굳이 비유를 하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나는 3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현재기준 비혼 여성이다.

주변 친구들이 하나씩 결혼을 하는 걸 보고 혼자 골똘히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결혼이란 무엇인가. 결혼은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가. 1차로 내렸던 결론은, 결혼은 '이벤트'라는 사실이다. 지금은 30대인 내가 만약 결혼을 하지 않고 시간이 흐른다면. 그럼 자녀까지 없을텐데 40대와 50대, 60대‥ 지금과 아주 흡사한 인생이 되풀이 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일하고 취미생활하고, 친구를 만나고. 그 때 되면 가정을 이룬 친구들이라 만나기도 힘들려나.

마치 구글에서 잊을만하면 제공해주는 서비스 중 하나로 '2년 전 오늘', '1년 전 오늘'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면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자주 만나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혹은 혼자 갔던 카페와 음식점. 자연. (좋아하는)커피.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을 하는 걸까. 인생에 있어서 '메가 이벤트'가 필요하기 때문에. 르네가 표현한 대로 '자기 자신과 대면해야 하는 그 고통스러운 작업'을 '미루도록 도와주기'때문에?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면 늘 다시 나는 스스로 제어한다. 책 <신과 나눈 이야기>에도 나왔듯 혼자서 충분히 매력적이던 인간 두 명이 연인이 되어 '함께 짝을 이루지만', '오히려 더 못하다는 사실만 깨닫게' 되고, '독신일 때보다 더 못하다고 느끼게 되는' 그 순간을 더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둘이 함께있는데도 느껴지는 외로움loneliness이 혼자일 때 느끼는 고독solitude보다 더 힘들 것 같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혹은 지금의 나는 사람으로부터 느끼는 것보다 책에서 느끼는 세상이나 인격, 인간군상, 살림살이가 더 와닿는다.(내가 극히 드문 INTJ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남들과 어떻게 지내는 가가 아니라 주어진 시기에 내가 어떤 상태고, 뭘 하고 있고, 뭘 갖고 있는 지를 주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신과 나눈 이야기>의 닐 도날드는 "너희가 구원받을 길은 남들의 행동action이 아니라 자신의 반응re-action이라"고 했다.


  이 책의 주인공 르네는 누구보다 자신의 반응과 자기 자신의 생각과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늘 남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많고, 보여지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이런 르네의 모습을 이질적으로 느낀다. 그래서 결국 1)남들이 하지 않는 일이나 생각을 해야하는 어려움과 2)남들에게 받는 모순된 관심이 더해져 두 배로 힘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지않은 것은 그런 '우아함'이 가져다주는 내면의 행복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이 책을 읽는 우리는 그래도, 이 시대의 지성인이니 고슴도치의 가시가 향하는 방향을 지금이라도 다시 제대로 한 번 설정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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