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하는 밤

음악을 사랑하는 아이

by 봄날

아무것도 안 하는 중이에요.


쓰고 보니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귀로는 라디오를 듣고 있고, 눈으로는 책을 읽다가 좋은 구절이 보여서 노트북을 펼쳐 발췌한 문장을 필사했어요. 어떤 책은 모든 문장이 다 좋아서 책 한 권을 필사하고 싶어지는 책도 있고요. 처음엔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글귀가 아니었지만, 필사를 하다 보면 두고두고 마음에 남는, 여운이 긴 글귀도 있어요.


오늘은 퇴근길에 마음이 조금 편안했어요.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도착해서 저녁 준비를 하고, 아이들을 챙겨 먹여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늘 나를 괴롭혔었는데요. 이제는 아이들도 많이 자랐고, 무엇보다 오늘은 남편이 약속이 있다고 했거든요. 오랜만에 좋아하는 빵집에 들러 빵을 고르고, 반찬 가게에서 주먹밥도 샀어요. 혼자 해결하는 저녁은 그걸로도 충분해요. 가족들과 함께 일 때는 퇴근하자마자 바쁘게 육수를 내고, 냉장고를 뒤져서 뭐라도 하나 만들어 저녁을 먹느라 바쁜데요.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려고 마음먹었거든요.


사람은 33세 이후로는 새로운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 어렵다고 하네요. 보통 10대, 20대에 들은 음악들이 평생을 간다고 해요. 라디오에서 방금 들은 이야기예요. 정말 그런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며칠 전 아이와 밤 산책길이 떠올랐어요.


아이와 손잡고 걷는데, 아이의 몸짓이 둠칫 둠칫 리듬을 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가만히 보니 저와 맞닿은 반대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혼자 무슨 음악을 듣냐고, 엄마도 같이 듣자고 했더니 잠깐 망설이다가 나머지 한쪽 이어폰을 제게 건네더군요.

띵띵 띵, 따라라, 흘러나오는 음률에 가벼운 걸음을 걸으며 아이가 말해요.

“엄마 어때? 이 음악 좋지? 나 처음 들었을 때 소름이 쫘악, 하루 종일 이 음악만 들으래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이후로도 계속 몇 곡 째, 노래에 대한 칭송과 설명이 이어지는 거예요. 처음에는 어, 그러네, 좋네, 신나네, 맞장구를 치다가 저도 모르게 진심이 새어 나왔어요. 근데, 이런 식의 음악 이전에도 들어봤는데?

아이의 눈빛에 서운함이 밀려들었어요. 심사숙고 끝에 어렵게 선곡 해서 엄마에게 소개한 음악인데, 제가 좀 너무한 것 같죠? 입을 삐죽 내민 아이에게 그 날은 결국 사과를 했어요. 오늘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를 아이에게 말해주면 아이는 뭐라고 할까요? 엄마가 새로운 음악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것은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거라고, 아주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말해주면 아이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까요?


아이는 눈뜰 때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음악을 계속 들어요. 밥 먹을 때, 공부할 때는 좀 귀를 쉬어주라고 얘기해도 소용이 없고요. 좋아하는 음악을 저에게 들려주었는데, 제가 별 반응이 없으면 엄청 속상해 하곤 해요. 아이의 음악 사랑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평생 간직할 소중한 추억들을 수집 중인 거였네요. 힘든 순간에 위로가 되어주고, 행복한 시간을 오롯이 떠오르게 해 줄 노래들을 몸과 마음에 차곡차곡 저장하고 있나 보네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아이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음악을 들으며, 엄마와 함께 리듬에 맞춰 함께 거닐었던 그 순간을 기억해 줄까요? 아이가 그 순간을 떠올리고 잠시라도 미소 지을 수 있다면 좋겠네요.


*오늘 <시요일>에서 발견한 <오늘은 없는 날>이라는 시 구절에서 제목을 가져와 보았어요. 김선우 시인의 <내 따스한 유령들>이라는 시집에서 전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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