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대학에 원서 쓸 때 서로 다른 성격의 과에 지원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물리학과랑 법학과랑, 전혀 관련 없는 학과도?
아침을 먹다가 아이가 던진 질문이다. 어젯밤 학교에 제출해야 되는 신청서에 희망대학과 희망 학과를 쓰는 칸이 있더니 이런저런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 물론 가능하지. 엄마도 대학교 지원할 때 수학과랑, 또 하나는 어문계열학과를 지원했었어. O대에 면접 보려고 할머니랑 둘이서 서울에 처음으로 왔었는데... 그때 참 신기하고, 낯설고 그랬어.
부산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밤늦게 도착한 서울은 어둡고, 춥고, 쓸쓸했다.
엄마도 나도 서울은 처음이었지만, 어디를 어떻게 찾아갔는지에 대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요즘처럼 지도 앱이 있지도 않았으니, 엄마는 아마도 물어물어 찾아갔으리라. 알뜰한 엄마는 조금이라도 저렴한 숙소를 찾아 좁은 골목길을 헤매었고, 드디어 찾아낸 원하는 가격대의 낡은 여관방은 좁고 어두웠다. 지글지글 끓는 온돌방의 열기 속에 두근두근 설레고 떨리는 맘을 진정시키고 잠을 청했던 밤. 여관방 한편에 딸린 욕실의 수도꼭지에서 똑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 서울이라는 도시를 스쳐 지나는 다른 누군가의 기침 소리, 그리고 여관방 창문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로 남아 있는 그날 밤에 대한 기억.
새벽부터 일어나 세면대도 없는 욕실에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감았고, 그때 수챗구멍에서 올라오던 역한 냄새와 으스스 추워서 팔뚝 위로 소름이 돋았던 것까지 떠올랐다.
그 당시 O 대는 대학 캠퍼스 느낌이 들지 않는 단출한 회색 건물이 다였고, 잔뜩 긴장한 나는 복도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어깨를 움츠리고 면접 순서를 기다렸다. 주변에서 대학생들로 보이는 선배들과, 나처럼 면접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학생들이 간간히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들리는 높은음의 억양에 나는 주눅이 들었던 듯하다.
면접장에 들어가서도 부산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나긋나긋하고 친절한 어투의 질문에 더 위축되었고, 제대로 대답을 하긴 했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접이 끝나고 나와서는, 서울이라는 낯선 공간에 왠지 좀 더 친밀해진 느낌과 기대감이 차오르기도 했다.
밖에서 기다리던 엄마를 만나, 서울까지 왔는데 구경이라도 좀 해볼까, 하는 얘기를 하다가, 물어물어 6∙3 빌딩에 갔다. 알뜰한 엄마는 입장료가 비싸서 망설이는 눈치였고, 눈치 빠른 딸은 한강변에서 산책하는 것이 더 하고 싶었다며 엄마를 거대한 빌딩이 올려다 보이는 한강변으로 이끌었다. 아직은 차가운 강변의 겨울바람에, 다가오는 봄기운을 어렴풋이 느끼며, 흐르는 강물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낯선 도시 속에 포함된 사람이 된 것 마냥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 우와, 엄마 그럼 결과가 어떻게 됐어요? 합격했어요?
- 응, 근데 둘 다 합격해서, 집 근처에 있는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됐지. 그때 엄마가 수학과를 선택하지 않고 어문계열학과를 선택했더라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 어, 그럼 우린 이 세상에 없었겠네? 나도 없고, 형아도 없고, 형아 친구 주영이 형도 없고, 우리 집도 없겠네?
- 하하. 그러게. 아니면 어딘가 다른 집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르지.
- 엥? 싫어. 난 엄마 아들로 태어날 거야! 엄마는 다시 돌아가도 원래대로 선택해요. 알았죠? 헤헤.
아이의 애교 섞인 대답에 출근 시간이 다가오는 것도 잠시 잊고, 웃음꽃이 피어났던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