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이는 내 가장 가까운 친구다.
내가 울적할 때 다가와 나를 웃게 하며, 지치고 외로울 때면 훈이를 꼭 끌어안고 에너지를 충전하곤 했다. 방학이면 훈이랑 미술관 구경도 가고 예쁜 카페에서 수다도 떨었다. 매일 나를 두 팔 벌려 안아주고 종알종알 이야기 늘어놓던, 훈이가 벌써 고등학생이 되었다. 작은 손으로 내 등을 토닥이던, 또래 아이들보다 작고 말라서 늘 마음이 쓰이게 하던, 녀석이 요즘은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긴다. 여전히 엄마에게 장난도 치고 포옹도 잘하지만, 가끔 청개구리처럼 엄마 속을 뒤집어 놓기도 한다.
이제 훈이는 주말에도 학원을 간다. 녀석을 학원에 보내 놓고 마음껏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엄마, 비 와.”
“우산 안 가져갔어?”
훈이는 평소에 작은 우산 하나를 가방에 꼭 챙겨 다닌다. 어릴 때 이미 갑자기 비가 와도 우산을 갖다 줄 사람이 없음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나 우산 잃어버렸다고 얘기했는데, 엄마 또 잊어버렸구나?”
“아, 그랬나? 그래서, 데리러 오라고?”
“응.”
“그냥 뛰어오면 안 돼?”
나는 그만 모처럼의 게으름을 계속하고 싶어 진다.
“응, 안돼! 나 비 맞기 싫어하는 거 알잖아?”
이 녀석은 늘 당당하다. 엄마에게 요구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는 막둥이라서, 나는 이 녀석이 더 사랑스럽다. 나는 어린 시절 늘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던 아이였기 때문에, 녀석의 거리낌 없음이 귀하다. 어쩌면, 남편의 말대로 막둥이의 버릇없음은 다 내 탓이다.
아침에 식탁에서 훈이가 또 말장난을 하길래, 얼른 남편에게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얘가 요즘 이래, 내 말을 안 듣고 까불어. 어제는 빗길에 미끄러우니까 뛰지 말고 가라고 했더니, 내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달려가는 거 있지.”
세상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훈이가 변명을 했다.
“그야, 엄마 웃으라고 그런 거지.”
설거지하고 있는 등 뒤로, 훈이가 다가와 속삭인다.
“엄마, 나 숙제 다 했다!”
"잘했네!"
속으로는 학원 숙제를 다 한 게 무슨 자랑이냐, 싶었지만 칭찬해 주었다. 그랬더니 녀석은 갑자기 내 손에서 고무장갑 한 짝을 빼내고는 자기 머리 위에 내 손을 갖다 대었다. 쓰담 쓰담해 달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내 강아지의 애교 앞에서 나는 또다시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어느새 나갈 준비를 한 녀석이 현관문 앞에서 인사를 한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와.”
현관문을 열고 나가다가 돌아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말한다.
“엄마, 학원 끝나고 친구랑 놀고 온다!”
“뭐?”
대답할 틈도 안 주고 꽈당 문을 닫고 나가는 녀석의 뒤 꽁무니를 바라보며, 나는 중얼거린다.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