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남은자들 03화

경은 어디에 (3)

단편 소설

by 포도씨

토요일 오후, 홍대 전철역 입구에 서서 경은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혜에게 경은이와 친해지기 위해 둘이서 아빠와 딸의 데이트를 해볼까 한다고 제안했다. 선혜, 경은이 모두 반겨했다. 각양각색의 사람이 각자의 개성을 뽐내며 주말 홍대 거리를 즐기고 있었다.


아저씨!


경은이 도착했다.


이런 데서 보니까 또 새롭네요? 이제 어디가죠?


우리는 거리를 구경하다 옷가게에 들어갔다.


경은이 입고 싶은 옷 있으면 다 입어봐.


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봤자 엄마가 다 버릴게 분명해요.


이번에는 아저씨가 사준 거니까 꼭 못 버리게 할게. 그러니까 한번 골라봐.


경은이는 평소 입고 싶었던 옷들을 입어보기 시작했다. 대부분 중성적, 남성적인 느낌의 옷들이었다. 옷을 산 후에는 이른 저녁을 같이 먹고 밖이 훤히 보이는 노래방으로 향했다. 경은이가 쭈뼛거리길래 먼저 마이크를 들고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를 선곡해 불렀다. 잘 부르지 못해도 목청껏 노래를 하고 있자니 경은이도 이내 노래를 선곡해서 예약했다. 우리는 서로를 신경 쓰지 않고 악을 쓰듯 노래를 불렀다. 내가 부를 때는 경은이가, 경은이가 부를 때는 내가 서로의 노래를 따라 소리를 질렀다.


와, 아저씨 재밌네요?


너는 어떻고.


저도 이렇게 논 게 거의 처음인 거 같아요. 다음에 또 같이 놀아요.


택시를 불러 집으로 향했다.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는 우리를 맞이한 선혜는 적잖이 당황했다.


아니 이게 뭐야? 경은이 옷은 제가 사고 있잖아요.


딸이랑 데이트하는데 옷 몇 벌 사줄 수도 있잖아요. 경은이가 좋아하는 걸로다 사줬어요.


선혜의 낯 빛이 어두웠다.


이런 걸 사 오면 어떡해요. 이거 안 돼요. 안 어울려요.


아저씨가 사준 거야. 이거 버리면 아저씨 엄청 화낼걸?


너, 이 녀석이.


다시금 내가 중재에 나설 차례였다.


그만해요. 이제 성인인데, 언제까지 그렇게 다 해주려고 해요.


안 돼. 안 되니까 다 이리 줘. 내가 내일 가서 다 환불하고 올 테니까.


그만 좀 해! 진짜! 지긋지긋하다. 버리든 말든 맘대로 해! 나도 포기할란다. 아오.


소리를 지른 경은은 방으로 들어가 문 소리가 세게 나도록 힘주어 닫았다. 문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선혜에게 경은이 좀 하고 싶은데로 놔두면 안 되는지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할 수 없어서 이제는 원하는 게 뭔지도 잘 모른다고 괴로워하는 경은이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선혜의 마음이 조금은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선혜가 말을 끊었다.


경은이는 어릴 때부터 다른 애들이랑 조금 달랐어요.


선혜의 말에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순 남자애들 좋아하는 로봇 만화나 찾아봤고, 남자 애들이랑만 놀려고 했어요. 애교라곤 찾아볼 수 없고, 골목대장처럼 동네나 돌아다니고. 근데 크면서 더 남자애처럼 굴더라고요. 나는요 제가 남자가 될 까봐 두려워요. 무서워요. 신식 씨, 제발 경은이 편들지 말아 주세요.


경은이가 남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돼요. 취향이야 다양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다고 여자애가 남자애가 되겠어요?


저한테 경은이를 빼앗지 말아 주세요. 그럼 나는 견딜 수 없어요. 저 잠시 밖에서 바람이라도 쐬고 올게요. 먼저 자요.


선혜가 밖으로 나가버린 후 나는 경은이 방문에 노크를 했다. 다행히 경은이가 문을 열어줬다.


거 봐요. 아저씨. 우리 엄마는 안 돼요.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지난번 이야기를 나눴던 놀이터 벤치에 가 앉았다. 지난번과 다른 것은 손에 맥주 두 캔을 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저씨, 저 도와주려고 해서 고마워요. 저 때문에 괜히 엄마랑 사이 안 좋아져서 어떡해요.


아냐. 아저씨가 경은이 부모가 된 이상 경은이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해야지. 사실 아저씨도 엄마가 잘 이해되지 않아.


그걸 누가 이해할 수 있겠어요. 말했잖아요. 엄마는 나에 대해서만큼은 돌았다고요.


별 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저씨. 저 비밀 하나 말해줄까요?


뭔데?


지난번에 아저씨가 저보고 여자애들이랑 같이 친하게 안 지내는 이유 물어본 적 있죠?


응.


사실 저. 여자 좋아해요.


경은이는 땅바닥만 바라본 채 말을 이어갔다.


어쩌면, 어쩌면요. 엄마도 그걸 눈치챈 게 아닐까요?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그런지도 몰라요. 저 이상하죠?


나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경은이에게 필요한 말이 무얼까 고민했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경은아. 네가 어떤 사람이든, 네가 어떤 취향을 가졌던 너는 이제 내 딸이란다.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이든 너의 가족이란다.


우리 둘은 말없이 맥주 캔을 부딪히고 마시기 시작했다. 어쩌면 선혜의 행동이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했다.


퇴근 후 카페에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전 핸드폰에 문자가 한 통 들어와 있었다.


‘경은이 아빠요. 잠깐 만납시다.’


선혜는 내게 경은이 친부와 사별했다고 했다.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호적 처리도 되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죽었다는 경은이의 친부에게 만나자고 연락이 온 것이다. 나는 당황했지만 일단 선혜나 경은이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만나봐야 겠다고 판단했다.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에 따라 무엇을 물어보고 말해야 할지가 결정될 것 같았다.


멀리서 후줄근한 인상의 한 남자가 자리로 찾아오고 있었다.


김규태라고 합니다.


이신식입니다. 어떤 일로 연락하신 거죠?


경은이는 제 자식입니다. 어릴 때부터 경은이를 찾아다녔죠. 선혜 그 년이 나를 속이고 도망치는 바람에… 제가 이제까지 내 자식을 찾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압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경은이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선혜 그 독한 년이 거짓말을 잘도. 내가 죽긴 왜 죽습니까. 이렇게 살아있는데.


남의 아내에게 듣기 거북한 소리는 그만하시죠. 지금은 제 아내이고, 제 딸의 엄마니까.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경은이를 놓아주쇼.


규태는 나를 찾아오기 얼마 전에 경은이를 먼저 찾아갔다고 했다. 가서 자신의 존재를 밝히고 친부이니 자신을 따라 같이 가자고 이야기했다. 경은이도 친부가 죽은 줄 알았기 때문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였지만, 곧 이제까지 자신을 속인 선혜에게 분노했다고 한다. 규태는 선혜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믿을 수 없는 사람인지 알려줬다고 한다. 그러나 경은이는 이미 자신에게는 아버지가 있고, 가족이 있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참 당황스럽군요. 그러나 제가 말씀드릴 것은 이것입니다. 경은이는 이미 제 딸입니다. 한 가족이고요. 제발 경은이를, 우리 가족을 그만 흔들어 주세요.


말이 안 통하는 구만. 내가 친부라고. 내 어떻게든 경은이를 데려가고 말겠어.


누구를 따라 갈지는 경은이가 결정할 일이죠. 당신이 정할 일이 아냐.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남 가족사에 껴들지나 말고 꺼지쇼.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혜가 저녁 음식을 차려놓고 식사 준비를 했던 식기들을 설거지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밥 다 식겠네. 오늘 경은이는 늦게 온데요. 얼른 앉아서 식사해요.


저기, 경은이 아빠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게 있나요?


들고 있던 접시가 떨어지며 큰 소리가 났다. 선혜는 떨어진 접시를 주우며 마른걸레로 바닥에 묻은 비눗물을 닦기 시작했다. 내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갑자기 그건 왜요?


오늘 규태라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랬군요. 맞아요. 규태가 경은이 친부가.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난 그저 규태에 대해 잊고 싶었어요. 그리고 경은이에게 친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절대 하고 싶지 않았고요. 단지 그것뿐이었어요.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사별했다고 들어서 물어보진 않았었는데, 그럼 왜 헤어진 거였어요?


헤어진 이유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미안해요. 다른 비밀 같은 건 없어요. 정말. 그러니까 그렇게 알아줘요.






규태는 의자에 테이프로 묶인 채 있었고, 나는 서서 그런 규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대치 중이었다.


내가 모르는 것을 알려줘. 그때 당신은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고 했었어.


당신이 정말 감당할 수 있겠어?


말하지 않으면 당신이 살인범이라고 내가 경찰에 신고하겠어!


알겠어. 알겠으니까. 이것 좀 풀고 말합시다.


나는 규태를 풀어줬다. 규태는 풀려나자마자 주먹으로 내 얼굴을 가격했다.


아오.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나는 규태에게 맞은 얼굴을 감싸고 규태 맞은편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들었다.


선혜가 죽었다고 했지? 경은이는 어디 갔는지 모르고. 혹시, 혹시 말이야. 이건 그냥 내 상상인데…


뜸들이지 말고 빨리 좀 말해. 당신한테 맞은 데가 욱씬거리니까.


경은이가… 선혜를 죽인 게 아닐까? 내가 말이야…경은이를 따로 만났는데…경은이한테 다 얘기해줬거든. 선혜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어릴 때 있었던 일들 모두. 그랬더니… 길길이 날뛰더라니까.


그래서, 그래서 그 내용이 뭐였는데?


휴. 경은이는 말이야. 사실 아들이었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경은이는 딸이다.


불쌍한 것. 태어나자마자 지 엄마가 병원에 부탁해 가지고 포경 수술을 했는데… 의사가 실수로 고추를 잘라버린 거 있지. 고상하게 말해서 음경. 그런데 선혜 그 년이 경은이를 여자 애로 성 전환 시켜버린 거야. 의사도 지 인생 망치기 싫었는지 그렇게 해버렸더라고. 분명 그 년 합의금으로 한 몫 잡았을거야. 분명히. 그리고 나서 곧 내 앞에서 자취를 감춰버렸어. 내가 수소문 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당신이 알아? 내가? 응? 돈은 또 얼마나 썼고…


나는 규태의 말도 들리지 않은 채 잠시 아무런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다 서서히 지금까지의 일들이 이해 가기 시작했다. 선혜의 그 과도한 집착과 행동들, 어쩌면 그건 경은이를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은 아니었을까. 경은이의 고민과 마음은 가위로 난도질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집에 들어와 경은이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경찰에게 이 사실을 전해줘야 할까. 그래도 되는 걸까. 그때 거실에서 TV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TV를 끄지 않고 나갔었나 보다. 뉴스에서 앵커가 기사거리를 읽고 있었다.


서울 00동에 위치한 한 산부인과에서 노년의 의사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경찰은 용의자에 대해 아직 단서를 찾고 있으며…


내 머릿속에서는 가위를 들고 있는 경은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놓쳐버린 많은 것들이 가슴 속에 들이차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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